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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제에서 환란까지:16(문민정부 5년: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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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제에서 환란까지:16(문민정부 5년:38)

입력
1998.06.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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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송신탑 고장’ 실명제발표장 긴장/“TV중계 안되고 있다” 수리후 YS 다시 낭독/“13일은 금요일,11일은 보선前,결국 12일 D데이/“발표날 통보받은 박재윤 수석 “이럴수 있나” 참담금융실명제 발표 몇시간전인 93년 8월12일 오후. 과천 관가가 갑자기 술렁거렸다. 「이경식(李經植) 부총리가 교체된다」는 소문이 돈 것이다.

이부총리의 회고. 『원래 이날 오전 10시30분에 「94년 예산안」보고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예산보고에 앞서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이 낭독할 긴급명령 담화문 원고를 받기 위해 오전 9시에 독대일정을 잡았놓았는데 의전수석실이 독대와 예산보고를 9시로 합쳐버린 거예요. 아차 싶더군요. 그래서 8시45분쯤 미리 대통령을 뵙고 원고를 받고나서 곧 예산안 설명을 드리겠다고 했더니 김대통령께선 예산보고는 나중에 하라는 것이었어요』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이석채(李錫采) 예산실장은 「대통령께서 예산안 보고를 받지 않겠다고 하신다」는 의전수석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다른 것도 아닌 나라살림살이 설명을 대통령이 물리친 것은 전례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기획원에선 「대통령이 부총리를 만난 뒤 예산안 보고를 거부했다」「부총리 신상에 변화가 올지도 모른다」는 추측성 소문이 퍼져나갔다.

이부총리의 설명. 『오후 3시30분쯤 기획원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휴가중인 최종찬(崔鍾璨) 대변인을 5시30분까지 사무실에 대기시키라고 지시했습니다. 예산안 보고가 무산돼 경질설이 나도는 상황에서 아무런 설명없이 휴가중인 대변인까지 긴급호출했으니 기획원 간부들은 내가 퇴임기자회견을 준비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합디다』

12일의 해프닝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청와대비서실은 오후 5시가 넘어서야 각 부처 장관들에게 금융실명제 긴급명령의결을 위한 임시국무회의 소집을 통보했다. 오후 7시. 황급히 청와대로 모인 전 국무위원들이 긴장된 얼굴로 앉았다. 하지만 탁자위에 가지런히 놓여있어야 할 안건자료들이 그 시간까지 도착하지 않았다. 7시30분 담화문 생방송발표를 위해선 25분까지는 국무회의를 끝내야할 상황이었다.

이부총리의 기억. 『식은 땀이 흘렀습니다. 몇분뒤 긴급명령과 시행령 등 자료가 도착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국회동의안이 없는거에요. 자료전달을 담당한 실무자가 실수로 빠뜨린 것이었습니다. 결국 김대통령은 긴급명령 국회동의안을 구두로 제안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통령의 담화문 발표에서 또 한차례 소동이 벌어졌다. TV카메라 앞에서 김대통령이 특별담화문 낭독을 시작한 지 10분쯤 지났을까. 이경재(李敬在) 공보수석이 갑자기 당황한 얼굴로 김대통령에게 다가갔다. 남산 송신탑이 고장나 TV 생중계가 되지않는다는 것이었다. 결국 송신시설 수리가 끝나고 오후 7시45분부터 김대통령은 담화문을 다시 한번 읽어야했다.

8월12일이 처음부터 「D데이」로 정해졌던 것은 아니다. 이부총리가 7월9일 초안보고에서 건의한 시행일은 8월21일(토요일)이었다. 전국의 모든 금융기관 직원들에게 실명제 실무교육을 실시하려면 최소한 다음날 오전은 문을 닫아야 하므로 일요일을 교육시간으로 활용하려면 발표일로는 토요일이 가장 적당했기 때문이다. 다만 21일이 어려우면 1주일 연기(28일)하기로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김대통령도, 이부총리도, 홍재형(洪在馨) 재무부장관도 비밀유지가 불안했다. 실무팀 역시 초인적 강행군으로 8월7일 모든 작업을 마무리짓자 시행시기를 앞당기자고 재촉하던 터였다.

8월9일 이부총리는 김대통령에게 실명제 최종시행안을 보고하면서 「D데이」단축을 건의했다. 『각하, 자료를 비밀리에 인쇄하려면 최소 48시간은 걸립니다. 따라서 11일 이후엔 언제라도 시행이 가능한데 12일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보안때문에 신경이 곤두섰던 김대통령도 대찬성이었다.

실무팀 멤버 R씨의 증언. 『11∼14일중 하루를 택하기로 했는데 14일은 다음날인 광복절에 온나라가 법썩을 떨 것 같아 제외했습니다. 13일은 이튿날이 오전영업만 하는 토요일인데 금융기관 직원교육 반나절을 폐장할 경우 금융거래가 종일 중단된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솔직히 13일에 금요일이란 점도 찜찜했어요. 11일은 대구·춘천 보궐선거 전날이어서 정치적 오해의 소지가 있었고 결국 남는 날짜는 12일 뿐이었지요』

실명제 택일과 관련, 박재윤(朴在潤) 경제수석의 해석은 독특했다. 94년 금융학회 경주세미나에 참석한 박수석은 『실명제를 8월12일 저녁에 전격발표한 것은 당시 보선패배충격을 희석시키기 위한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명제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D데이는 8월9일 이부총리의 최종안 보고때 결정된 사항이다. 더구나 박수석은 실명제에 관한 한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다』며 그의 「선거 희석론」을 일축하고 있다.

실명제 준비과정에서 박수석의 소외는 수수께끼와도 같은 대목이다. 박수석이 김대통령으로부터 실명제 시행통보를 받은 것은 발표 불과 5시간전인 오후 3시께. 그렇다면 김대통령은 왜 최측근이자 열렬한 「신경제 신자」였던 박수석을 「물먹이고」 부총리와 「직거래」했을까.

전직 고위관료 Q씨의 해석.『박수석은 실명제 실시시기를 94년 하반기이후로 생각한 것 같아요. 중환자가 대수술을 받으려면 우선 몸부터 추스려야하는 것처럼 실명제같은 대개혁을 추진하려면 경기회복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외과수술론」이 박수석의 지론이었지요. 김대통령도 실명제에 적극성이 없었던 박수석에게 거사를 맡기기고 싶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통령을 바로 옆에서 보좌하는 경제참모로서 경제질서를 뿌리채 흔드는 엄청난 개혁작업이 진행된다는 사실을 당일까지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박수석의 기분은 참담했다. 당시 청와대에 근무했던 Y씨의 회고. 『실명제 단행통보받고는 박수석은 한동안 일손을 놓았습니다. 김대통령도 미안해서인지 이후 실명제 후속작업을 박수석에게 맡겼고 덕분에 박수석은 대통령께 매일 첫보고를 하는 혜택이 주어졌습니다』

실명제 발표 다음날인 13일 저녁. 박수석은 이영탁(李永鐸) 비서관을 데리고 시내 모음식점에서 김용진(金容鎭) 재무부세제실장을 만났다. 박수석은 격앙되어 있었다. 『김실장, 이럴 수가 있는 거요. 나를 이렇게 빼다니. 수석을 그만두란 얘기 아닙니까』

김실장은 난처했지만 차마 「대통령께서 수석에게 비밀로하라고 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수석께서 화내실 일이 아닙니다. 시행여부를 판단할 상황이라면 수석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이미 대통령이 결정한 이상 실무자만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날 박수석과 김실장은 대취했다.

섭섭하기로는 황인성(黃寅性) 국무총리도 덜하지 않았다. 황총리는 실명제 발표후 이부총리와 홍장관에게 『나한테는 좀 일찍 얘기해도 되는 것 아니요』라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전직 고위관료 Y씨의 증언. 『실명제 직후 화폐개혁설이 나돌았습니다. 국무회의에서도 이 문제가 거론됐는데 홍장관이 「있을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하자 황총리는 「장관도 모르게 또 어디서 준비되고 있을지 누가 알겠소」라며 쏘아붙였다고 합니다』

어쨌든 금융실명제는 김대통령이 정한 원칙대로 예외없이, 비밀리에, 최대한 빨리 시행됐다. 김대통령의 실명제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도 그만큼 각별했다. 재벌과 정치권이 실명제를 폐지, 또는 최소한 완화라도 해보려고 끈질지게 긴급명령 대체입법을 요구했지만 김대통령은 손질조차 거부했다.

그러나 97년초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그의 아들이 거액의 검은 돈을 관리하기 위해 실명제를 어긴 사실이 밝혀졌다. 아버지가 만든 것을 아들이 깼고 모든 것은 「위선」이 되고 말았다. 영광스런 첫 문민대통령에서 경제파탄의 책임자로 전락한 김대통령처럼 결국 경제개혁의 꽃으로 찬양받던 금융실명제도 마찬가지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이성철 기자>

◎실명제의 운명/전·노씨 비자금 등 검은돈 적발 ‘공헌’/IMF속 대체입법/97.12.31 ‘사망선고’

금융실명제의 수명은 4년 4개월20일(93.8.12∼97.12.31)로 끝났다. 일반서민들은 느끼지 못했지만 정치인 재벌 사채업자 불로소득자 등 「가진 자」들의 불편은 이만저만 아니었다. 비록 검은 돈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옛날처럼 음성거래가 활개치지 못하게 한 것만으로도 실명제의 존재이유는 충분했다.

실명제가 아니었다면 전직대통령의 비자금계좌는 영원히 숨을 수 있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12·12나 5·18의 진상규명도,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의 사법처리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명제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와중에서 대체입법이란 이름으로 사실상 폐지되고 말았다. 법과 실명거래 원칙은 살아있지만 그 골간을 무너뜨리는 무기명 장기채가 허용되고, 실명제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금융소득종합과세가 유보됐다. 실명제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지난해 12월29일 여야는 긴급명령을 법률로 대체하면서 실명제를 껍데기로 만들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끝까지 실명제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않았고 주위에선 「거부권」행사까지 진언했지만 그에겐 그럴 힘도, 권위도 없어진지 오래였다.

무기명 장기채는 큰손들에게 철저히 외면받고 있다. 종합과세유보에 따른 누진제 폐지와 이자소득세율 인상은 금융자산가들에겐 세금을 깎아주고, 서민에겐 세금을 올려받아 빈부차만 심화시키고 있다.

경제에 활력도 주지 못한 채 최소한의 정의까지 박탈하고 만 것이다. 실명제 작업멤버였던 한 전직관료는 『실명제 폐지로 행복해진 사람은 오직 2만∼3만명의 고액자산가들 뿐이다. 진정한 경제개혁을 위해 실명제는 부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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