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하면 1950년 6월25일을 생각하게 된다. 그날 태어난 갖난아기는 오늘 만 48세의 중년이 되었을텐데, 그렇다면 오늘의 50대 중반마저도 6·25의 쓰라린 체험은 없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회갑을 지낸 노인들이나 6·25를 알지, 국민의 절대다수는 동족상잔의 그 비극을 역사의 한 장면으로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4자회담이 열리고, 정주영씨가 소 500마리를 몰고 북에 있는 고향을 찾아간 일이 남북간에 화해의 무드가 조성되는 것 같은 착각을 갖게 하기도 하였다. 국제적 견제와 압력때문에 핵무기도 못 만들게 된 북의 인민공화국이 식량난에 허덕이면서 전쟁을 도발하기는 어려우리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평화의 가능성이 돋보였지만 동해에 침투한 북의 잠수정이 우리 어선이 친 그물에 걸려 발견되었다는 슬픈 소식을 전해들었으니 이게 어떻게 되는 일인가. 정주영씨 일행에게 꽃다발을 안겨주며 환영하던 그 시간에도 인민군의 잠수정은 동해바다를 누비고 있었던 것이다. 끔찍한 사람들이다.
6·25가 터지던 해에도 비슷한 일들이 있었다. 북은 소련군을 이북 전역에서 철수시키고 우리를 향해 미군의 철수를 독촉하였다. 당신들은 전쟁준비를 다 마쳤으면서 남한의 미군을 몽땅 철수케 하라고 야단하지만 전쟁도발의 위험이 사라지기 전에는 미군 철수는 불가능하다고 못을 박았어야 되는 걸, 당시의 주한미국대사 무초씨는 전세계를 향해 인민군의 남침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장담하면서 주한 미군을 전원 한반도에서 철수케 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북은 북에 구금돼있던 조만식씨와 남에 붙잡혀있던 유명한 공산당원 이주하, 김삼룡과 38선 어디에서 만나 무조건 맞바꾸자는 엄청난 제의도 하였다. 우리는 평화가 올 것 같은 허망한 꿈속을 헤매이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그 해 6월25일 38선 전역에서 인민군은 남침을 감행했던 것이다.
김대중 정권은 「햇볕론」을 내세우며 햇볕이 강풍보다 효과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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