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이 만들어낸 ‘스포츠 한국’/‘청와대 명령 재벌 실천’ 88올림픽 성공적 개최 밑거름/각 대기업들 개별종목 나눠맡아 재정지원등 큰 역할/외환위기로 비판받지만 ‘조직적 체계적 공헌’ 긍정요소도내 고향인 사우스 캐롤라이나주(州) 컬럼비아의 일간지는 5월초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에서는 「미스터 복싱」(Mr.Boxing)으로 알려진 크리스 히토풀로스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그는 선수시절 각종 상을 휩쓸었고, 나중에는 미국의 올림픽 복싱팀의 맡아 지도한 것으로 소개됐다. 신문은 또 『그는 82년에 석달동안 한국에서 84년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을 대비한 한국대표팀을 정비하는 일을 맡았다』고 썼다.
신문은 그와 가까운 친구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 사람들은 크리스를 알아보았다. 애틀랜타 올림픽때 그는 게임을 지켜보느라 3주동안 경기장 플로어를 지켰다. 대회 초반의 어느날 우리는 누군가가 「코치!」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은 코치가 된, 당시 한국팀에서 그의 도움을 받았던 권투선수중 한사람이었다』
히토풀로스의 사망 소식은 내 기억속에 많은 생각을 불러 일으켰고 한국에서의 경험들과 이어져 있는 운명적인 일에 부딪칠 때마다 나는 놀라곤 했다.
나는 크리스를 그다지 잘 알지 못했지만, 80년대초 조동하(趙東河)씨가 한국의 올림픽 복싱팀을 위해 「다이너마이트 김」대신 그를 채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강펀치를 갖고 있는 한국의 권투선수들을 지능적이고 효과적으로 점수를 딸 수 있도록 조련하는 데 성공했고 이때문에 한국팀은 82년 인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7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 신준섭(申俊燮)은 84년 LA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한국이 86년 9월 제10회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했을 때, 나는 한국이 갖고 있는 경이롭고도 조직적인 능력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운좋게도 아내와 나는 두 행사에 모두 참석할 수 있었고, 행사기획에서 부터 복잡한 교통·숙소 문제, 세계 각국에서 온 선수들의 상이한 식습관, 그리고 일정조정 등에 깊숙히 간여했던 나의 한국 친구들이 일궈낸 성공사례에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아시안게임은 86년 9월20일∼10월5일에 열렸다. 바로 나의 대사 임기 마지막달이었다. 무척 바쁜 시간이 될 것임은 분명했다. 많은 미국인들은 2년뒤로 예정된 서울올림픽이 어떻게 치러질 것인지 미리 알아보기 위해 한국 방문을 원했다. 내가 평소 즐거운 마음으로 교류하고 있던 워싱턴 DC의 헤리티지 재단에서도 대규모 대표단을 파견했다. 아내와 나는 대표단 175명을 위해 리셉션을 베풀었고, 9월29일에는 24명을 위한 저녁만찬을 열었다.
아시안게임 기간중 우리는 또 존 애쉬크로프트 미주리 주지사와 토머스 킨 뉴저지 주지사의 방문을 받았다. 미주리 주지사는 교보빌딩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했다. 뉴저지 주지사는 후에 내 모교(母校)인 「드루(Drew) 대학」의 총장이 됐다. 나의 딸도 일주일간 한국에 머물렀다. 그녀는 아시안 게임의 몇몇 행사에 관심이 있었다. 우리는 그녀와 함께 올림픽촌을 돌아봤고, 박세직(朴世直) 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이 여러 시설을 안내하면서, 점심을 대접했다. 우리는 그가 아시안게임에 관한한 세세한 일까지 모든 것을 정말 잘 알고 있다는 데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는 다가오는 올림픽의 성공을 예감케 하는 것이었다.
이 때는 또 많은 한국 친구들이 떠나는 우리를 위해 만찬을 준비하면서 우리가 꼭 시간을 내주도록 원했던 시기였다. 한국 출발은 10월25일로 예정돼 있었다. 떠나기 한달 전인 9월24일 세니와 나는 각별한 친구인 이홍구(李洪九) 서울대 교수의 저녁제의를 받아들였다. 이 교수 부부는 수년동안 여러 분야에서 우리와 많은 일을 같이 해왔다. 그날 저녁은 그렇게 눈코뜰새 없이 바빴던 마지막 두달동안 우리가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하는 몇 안되는 조용한 가족단위 행사중 하나였다. 이교수는 그후 정부의 중요 직책을 맡아 나갔다. 이중에는 김영삼(金泳三) 정부하에서의 총리직과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취임직후의 주미대사직도 포함돼 있다.
아시안게임에 이어 88년 서울올림픽은 대한민국을 세계의 핵심 관심사로 명확히 부각시키는 계기가 됐다. 27개국 선수들과 임원들이 아시안게임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그중 많은 사람들은 주최국의 철저한 준비와 축제 분위기, 색다른 편의시설에 경탄해마지 않았다. 올림픽 기간중 구 소련팀은 인천항의 대형 여객선에 묵었는데, 그들은 한국민이 이뤄놓은 훌륭한 성과와 그에 어울릴만한 환대에 「기절할 정도로」 감명받았다고 솔직히 말했다. 올림픽 개막날까지 남은 날짜를 세고 있었던 도시 곳곳의 광고판만한 커다란 시계를 10년후 얼마나 많은 한국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지 나는 궁금했다. 이 엄청난 국제적 행사를 개최한 한국에는 분명히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모든 사람은 희망과 올림픽 열기에 사로잡힌듯 했다.
아시안게임은 분명히 올림픽을 위한 성공적인 「총연습」이었다. 이 행사를 준비하는데 많은 비용과 노력이 필요했다. 각종 경기를 위한 특별 스타디움과 함께 올림픽 공원이 완전히 새로 건설됐다. 선수들이 묵을 아파트도 세워졌다. 경기가 모두 끝난뒤 이곳으로 이주해 올 사람들에게 비교적 화려한 이 숙소를 미리 분양함으로써 아파트건설의 재원을 마련했다. 한강이남을 서울 남동쪽의 새로운 상업 및 무역지대로 탈바꿈시키는데 올림픽 사업은 큰 도움이 됐다.
다가오는 경기와 관련, 가장 흥미있고 효과적인 사업은 한강개발사업이었다. 하루 24시간 꼬박 일해서 4년이상이 소요된 이 사업은 아시안게임이 개막되기 정확히 10일전인 9월10일 완료됐다. 미국의 많은 내 친구들은 한국민이 오염된 한강을 어떻게 깨끗이 만들어 훌륭한 운동장으로 바꿔 놓았는지를 전세계에 보여줬다고 나에게 말했다. 이 사업에는 거대한 준설(浚渫)작업과 강변의 여가공원 조성, 선착장 시설 및 유람선 계획 등이 포함됐으며, 심지어 36㎞에 달하는 올림픽 도로 건설도 포함돼 있었다. 진흙투성이의 지저분했던 한강은 깨끗해졌고, 그로부터 몇년뒤 한국민들은 야생동물이 자연 서식지로 되돌아오는 것을 지켜보며 보람을 만끽할 수 있었다. 여러 면에서 한강개발 사업은 장기적 관점에서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현대 한국의 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그 헌신적 노력에는 강력한 의사결정과 의지가 필요했다. 이는 앞으로 다가올, 수십년동안 커다란 혜택이 될 올림픽 유치 결정의 한 부산물이기도 했다. 몇몇 미국인들과 다른 외국인들은 한국이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들의 생각은 틀려도 너무 틀렸다.
한강개발 사업 완성 5일후 김포공항에서 테러리스트에 의한 폭탄 폭발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5명이 숨지고 29명이 부상했다. 북한의 위협이 만들어낸 긴장감이 여전히 상존하고 있다는 현실을 상기시켜 준 사례였다. 사실, 86년초 쿠바 공산지도자 피델 카스트로가 평양을 방문하는 동안, 북한 김일성(金日成)은 『한국국민은 제24회 서울올림픽을 평화롭게 개최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카스트로는 열렬히 환호했다. 그리고 다시 87년 11월29일 대한항공 858편이 태국해안에서 테러리스트의 폭탄에 의해 떨어졌다. 명백히 서울올림픽 참가를 저지하려는 의도였다. 더욱이 자국 선수단을 올림픽에 파견할 계획을 갖고 있었던 몇몇 나라들은 이는 용납할수 없는 일이라며, 베이징(北京)과 모스크바가 북한에 대해 경고할 것을 촉구하는데 동참했다. 한국으로서는 앞으로 다가올 「중요한 행사」에 대해 주요언론이 매일 관심을 보였던 참으로 중요하고 긴박한 시기였다.
일반적으로 언론 취재는 내가 특히 흥미롭다고 느꼈던 경기의 또 다른 면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는 사우스 캐롤라이나 고향친구인 크리스 히토풀로스와도 관계된 것이었다. 한국은 박정희(朴正熙)시대 이전부터도 여러 거대기업이 개인종목을 지원하도록 하는 일정한 패턴을 발전시켜 왔다. 복싱을 지원하는 일은 한화그룹에 떨어졌다. 전에도 자세히 얘기한 것처럼 나의 훌륭한 친구 김종희(金鍾喜·81년 7월 작고)씨는 81년 7월 내가 대사로 부임하기 직전에 사망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이 「화약그룹」의 전통을 이어갔고, 그와 많은 참모들은 수년동안 한국복싱에 많은 지원을 했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 아들인 김승연(金昇淵)씨가 대한아마추어복싱연맹(KABA) 회장이 됐다. 그리고 아시안게임이 개막되기 직전인 86년 9월19일 아시아경기단체총연맹(GAASF)의 신임회장으로 선출됐다. 이는 그와 그 동료가 앞으로 수년동안 복싱과 스포츠 행사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내 친구인 오수인(吳壽寅)씨는 한화그룹 계열사에서 핵심적인 일을 맡아온 예절바른 사람이었는데, 왜 복싱과 혹은 그 일과 관련된 국제행사에 자신이 간여해야 하는지 의문스럽다는 듯 가끔 머리를 가로젓곤 했다. 그러나 「영 다이너마이트」(김승연 회장의 별명)는 그를 유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97년 늦가을부터 시작된 외환위기와 한국 경제패턴에 대한 국제통화기금(IMF)의 압력으로 많은 한국인들은 외국의 비판가들과 함께 대부분의 위기 책임을 재벌들에게 돌렸다. 사실, 서양의 많은 사람들은 예전에는 「재벌」이란 용어를 들어보지 못했지만, 98년 봄이 되자 그것은 전세계에 상식적인 말이 돼버렸다. 한 한국친구는 나에게 『세계에 공헌하는 한국에 대한 보다 긍정적인 용어는 없었을까요?』라고 묻기도 했다. 아직도 나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되돌아보면서 한국이 재벌의 도움없이 이 사업을 조직적이면서도 체계있게 개최할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확실히 86년, 88년 게임을 위한 조직위원회에는 조직체계와 확고한 지도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때는 여전히 한국의 대기업들이 전제적인 방법으로 기업을 경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때였다. 청와대는 명령을 내렸고, 각료와 재벌회장들은 이를 수행했다. 국제 스포츠계 진입을 위한 싸움이 시작되면서 한국에는 거의 군대조직과 같은 지휘계통과 통제 체제가 형성돼 있었다. 가끔 산업계 지도층에 있는 몇몇 친구들은 자신들에게 개별종목을 지원하고 자금을 제공하라는 압력이 너무 많이 내려온다고 불평하곤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스포츠에 기여한 재벌의 재정적 지원은 기부금이 뇌물스캔들에 휩쓸려 조사받으면서도 별 관심을 얻지 못했다.
내 명망있는 친구인 한진그룹의 「찰리 조」(조중건<趙重建> )는 당시 대한항공 회장이었는데, 테니스 선수들을 맡았다. 이는 그가 테니스 경기에 관한 모든 접대와 필요한 음식물을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내와 나는 열렬한 테니스광이었기 때문에 그와 시간을 함께 할수 있었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었다. 우리는 특히 올림픽 테니스 경기에 참석할수 있다는데 기뻐했다. 윈스턴 로드 주중미국 대사가 베이징에서 왔고, 우리는 전세계 위대한 선수들이 열전을 벌이는 테니스 경기를 지켜봤다. 찰리는 정말 훌륭한 호스트였다. 그러나 접대 및 편의시설에 대한 자금지원을 그에게 맡김으로써 그의 팔이 얼마나 휘어져 버렸는지에 대한 약간의 불평도 있었다. 그러나 세계 최고의 테니스 선수를 지켜보고, 또 서울 올림픽에서 보여준 그들의 열정을 느끼면서 우리는 그와 그의 한국동료들이 충분히 이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趙重建>
물론, 올림픽때까지는 나는 거의 2년동안 외교관직에서 떠나 있었다. 당시 한국의 노태우(盧泰愚) 대통령 정부는 모든 전임 미 대사부부들을 그 행사의 손님으로 초청했다. 내 전임자 대부분은 이미 사망했거나, 참석할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세니와 나는 이 친절한 초대에 응할수 있는 유일한 부부였다. 우리는 88년 9월17일 개막식부터 10월2일 폐막식까지 황홀한 시간을 보냈다. 나는 한국이 이처럼 훌륭한 행사와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던 민족적 자존심, 통합, 그리고 업적에 필적할수 있는 일을 다시 한번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88년 올림픽은 참으로 분수령격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나는 최근 몇몇 한국친구들이 98년 외환위기를 걱정하기 시작할 때, 한국이 그 당시 어떻게 일어섰는지 그들에게 상기시켜 줬다. 김우중(金宇中)씨와 대우그룹의 많은 친구들은 기꺼이 요트경기를 지원했다. 그리고 노(櫓)를 이용하는 선수를 위한 경기장을 만드는데 많은 도움을 줬다. 현대, 효성, LG, 그리고 다른 그룹들은 민족적인 사업에 동참했다. 화사하고 매혹적인 전통의복을 입은 한국국민들이 수천명 단위로 참여한 안무(按舞)가 놀랄정도였던 개막식 및 폐막식 행사를 지켜봤을 때, 우리는 서로를 돌아보며 「VCR」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다행스럽다고 말했다. 우리는 「세계를 서울로」라는 두개의 비디오 테이프 복사본을 갖고 있다. 그것은 현대 한국역사의 가장 엄청나면서도 화려한 순간을 매력적으로 담고 있다. 이 행사에 참가했던 많은 사람들은 커다란 자부심속에 자신의 자녀와 손자들에게 이야기해 줄 것을 간직하고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번역=황유석 기자>번역=황유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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