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 부총리 독대때 ‘실명제’ 불쑥 제기/20분만에 브리핑 끝내고 “어떻게 할겁니까”/YS “하긴 하는데… 긴급명령 발동합시다”/이경식 “각하 증시 엉망되는건 각오하십시오”『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드디어 우리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합니다.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집니다』
93년 8월12일 오후 7시45분. 정규편성 프로그램이 중단된 채 TV와 라디오로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특별담화문 발표가 전국에 생방송됐다.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명령」이었다.
김대통령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 듯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특유의 단호한 어조로 담화문을 계속 읽어내려갔다.
『지하경제가 사라질 것입니다. 검은 돈이 없어질 것입니다. 금융실명제가 정착된다면 정치인 기업인 공무원 등 모든 국민이 자신들의 부에 대하여 떳떳하고 정당해질 것입니다』
역사적 금융실명제의 탄생순간이었다. 지하경제 척결, 정경유착 근절, 경제정의실현 등 늘 화려한 수식어를 곁들이며 「개혁중의 개혁」으로 꼽혔던 금융실명제는 시행(오후 8시)을 불과 15분 앞두고 이렇게 전격발표됐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하나회 숙정, 은행장 경질, 정적(政敵)제거…. 정권출범후 쉼없이 계속된 YS의 기습행보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국민들이었지만 휴가철, 그것도 일과가 끝난 저녁시간에, 전시에나 있을 법한 「긴급명령」으로 막이 오른 실명제는 의미와 파장은 생각할 것도 없이 그 자체가 하나의 충격적 사건이었다. 더구나 이날은 문민정부의 첫 정치적 시험대였던 대구·춘천 국회의원 보궐선거일이었고 세간의 관심은 온통 선거결과에 쏠려있던 터였다. 역시 YS다운 「깜짝쇼」였다.
김용진(金容鎭) 당시 재무부 세제실장의 설명. 『많은 사람들이 신중론을 개진했지만 속으론 다들 어차피 해야한다면 예고없이 전격적으로 실시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82, 90년 두차례 실패경험이 말해주듯 정치권의 입법절차를 거쳤다가는 호랑이 그리려다 고양이만 그리게 될 것이 뻔했어요. 실명제는 오직 통치권자의 결단으로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실명제는 대선공약이었지만 성사를 장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정공법의 명수인 YS라해도 반세기동안 굳어진 정치경제의 음성적 생태계를 완전히 파괴하는 일을 쉽게 결심할 수는 없었다. 정권출범초부터 「한다」「안한다」「곧 실시한다」「내년이후로 미뤄진다」등 온갖 추측이 난무했고, 그 때마다 금융시장은 출렁거렸지만 김대통령은 「임기중 실시」 방침만 되풀이할 뿐 시기와 방법은 함구로 일관했다.
이경식(李經植)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의 회고. 『대통령도 실명제에 신경과민이 되다시피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은 「금융실명제는 반드시 실시하며 착실히 준비하고 있다. 다만 시기와 방법에 대해선 말할 수 없다는 것외에는 어떤 말도 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습니다』 이부총리나 홍재형(洪在馨) 재무부장관은 각계에서 연일 빗발치는 실명제 질문공세에 이같은 대답만 되풀이했고, 덕분에 「앵무새 장관」「녹음기」란 별명까지 얻게 됐다.
7월초 국회 재무위원회. 국회의원과 홍장관은 몇시간째 설전이 이어졌다.
『장관, 실명제때문에 혼란이 이만저만 아니예요. 도대체 언제할 겁니까』 『가능한한 조기에 실시할 예정입니다. 다만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시기를 선택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명제 부작용이 최소화되는 시기는 언젭니까』 『적정한 시기가 언제일지 연구중입니다』 『도대체 무슨 답변이 그래요. 국회를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거요』 『…』
정부의 태도가 이렇다보니 실명제는 물건너간 것처럼 보였다. 8월12일 긴급명령 발표직전까지도 최소한 조기실시는 어렵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연막이었고 베일뒤에선 엄청난 비밀작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금융실명제가 햇빛을 보기 약 한달 보름전인 6월29일 오전.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이부총리는 김대통령에게 경제동향을 보고하고 있었다.
이른바 정례 독대(獨對). 유난히 보안을 좋아하는 YS 스타일 때문이었을까. 김대통령의 정례 독대는 과거 대통령들과는 달리 배석자, 심지어 비서실장이나 담당 수석비서관조차 배제되는 문자 그대로 독대였다.
이날은 특별한 보고사항이나 결제안건이 없었던 탓에 그저 경제 돌아가는 상황, 예컨대 경기회복이 다소 늦어지고 있다거나 사정활동 때문에 경제활동이 크게 위축되고 있다는 점등을 얘기했다. 20여분만에 브리핑을 끝낸 이부총리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김대통령에게 불쑥 「엉뚱한」 얘기를 꺼냈다.
『각하, 그러나 저러나 금융실명제는 어떻게 처리하실 계획이십니까』
김대통령은 이부총리의 갑작스런 질문에 흠짓 놀라더니 곧 고민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글쎄, 하기는 해야겠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부총리 생각은 어때요』
『빨리 끝내야 합니다. 시간을 끌수록 실명제는 하기 어려워집니다. 가급적이면 정기국회 시작전, 그러니까 8월에 실시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이부총리가 김대통령에게 밝힌 「8월 실시론」의 근거는 세가지였다. 첫째, 실명제를 빨리 단행하지 않으면 사정과 공직자 재산공개 등 기왕의 정치개혁작업이 성과없이 물거품이 된다. 둘째, 실명제는 시행후 후유증 치유에만 1년 가량 소요될텐데 만약 실명제를 더 늦추면 결국 임기 후반부엔 아무것도 하기 어렵고 어떤 경제적 업적도 올리기 어렵다. 세째, 통상적 입법절차를 밟아서는 제대로된 실명제를 만들기 어렵고 결국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해야하는데 국회회기중엔 긴급명령발동이 어려우므로 9월 정기국회이전에 가능한 시기는 8월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부총리에게 이런 실명제 논리를 제공한 사람은 한국개발연구원(KDI) 김준일(金俊逸) 박사였다. 김박사의 회고. 『얼마든지 실명제를 할 수 있는 여건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 충격을 너무 과대포장하고 있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그래서 3월초 KDI업무보고때 실명제는 대통령 취임후 2년안에 전격적으로 실시하되 중소기업 피해를 줄이기 위해 실명제에 앞서 금리자유화를 먼저 단행하는게 좋다는 내용을 이부총리에게 보고했습니다. 나중에 부총리가 다시 불러 실명제 문제를 별도로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이부총리는 왜 이날 보고안건에도 없던 실명제를 건의했을까. 이부총리의 설명. 『국론소모를 막으려면 어떤 형태로든 정부가 실명제 논란을 매듭지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최대한 조기시행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고 기회만 있으면 대통령에게 정식건의할 작정이었습니다. 마침 독대가 일찍 끝날 것 같아 얘기를 꺼낸 것입니다』
「개혁」이라면 무엇이라도 하려했던 YS. 이부총리로부터 금융실명제가 「정치개혁 완결」의 의미가 있다는 말을 들은 김대통령은 이내 표정이 밝아졌다. 『전적으로 동감이요. 역시 긴급명령 밖에는 방법이 없는 것 같아. 준비하는데는 얼마나 걸리겠소』
『2개월이면 충분합니다. 대신 성장률이 1∼2%포인트 정도 떨어지고 시행직후 증권시장이 엉망이 되는 것은 각오하셔야 합니다. 실명제 초안 골격은 열흘후쯤 보고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소. 작업에 착수하세요. 대신 이것만은 명심하세요. 최대한 빨리, 어떤 일이있어도 비밀을 지키면서, 예외없는 실명제안을 만들어야 합니다』
김대통령이 못박은 조기강행, 절대보안, 예외배제는 이후 실명제 준비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움직일수 없는 원칙이 됐다.<이성철 기자>이성철>
◎실명제의 역사/李張 사건 직후인 82년부터 거론/6공때 再시도 조순 물러나며 무산
93년 8월12일 탄생까지 금융실명제는 10여년간 두차례의 「유산」을 겪었다.
실명제 법제화 논의가 처음 시작된 것은 82년 5월 이철희·장영자 사건 직후. 지하경제의 망국적 폐해가 노출되자 정부는 실명거래실시와 종합과세방침(7·3 대책)을 내놓았다. 실명제의 선봉장은 개혁성향의 김재익 경제수석과 강경식 재무부장관이었다.
경제의 전권을 김수석에게 위임했던 전두환 대통령도 처음엔 실명제를 지지했다. 강장관이 『실명제 반대는 이적행위와 같다』고 정치권에 직격탄을 쏠 정도였다. 그러나 재벌들의 계속된 로비, 정치권과 청와대 정무라인의 반대속에 의지는 퇴색해 갔다. 결국 「금융실명거래에 관한 법률」이 82년 정기국회에서 「시행시기는 86년이후 대통령령으로 정한다」는 단서조항으로 수정통과됨에 따라 실명제는 결국 「시행되지 않는 법률」이 되고 말았다.
두번째 시도는 6공때였다. 금융실명제를 대선공약으로 제시했던 노태우 정권은 88년 12월 조순 경제팀이 등장하면서 「91년 전면실시」를 선언했고 금융실명거래 실시준비단(단장 재무부 윤증현 국장)까지 발족시켰다.
그러나 실명제는 노대통령이 재벌들과 사돈을 맺으면서 뒷전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3당 합당이 이뤄지고 개혁기조의 조순 경제팀이 실명제를 반대하던 정치인 출신 이승윤 경제팀으로 바뀌면서 결국 정부는 90년 4월 「실명제 무기연기」를 발표하고 말았다. 두차례 실패경험은 경제정의가 재벌과 정치권의 기득권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 따라서 실명제는 오직 기득권 세력을 배제하는 「깜짝쇼」로만 성공할수 있다는 교훈을 남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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