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馬’ 없고 뇌사기업만 대상 실망/실업 등 충격속 신인도 회복엔 도움55개 기업에 대한 강제퇴출조치로 기업구조조정에 마침내 시동이 걸렸다.
은행권의 이번 부실기업판정은 DJ노믹스 기업개혁철학의 골간인 「금융을 통한 기업구조조정」 원칙이 현실화했다는 점에서, 또 정치적 목적이나 공권력이 아닌 정상적 방법에 의해서는 처음으로 부실기업을 집단퇴장시킨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55개 기업의 강제퇴출로 2만5,000∼3만명의 실업자가 발생하고 약 5조원의 금융권 부실채권이 추가될 것으로 예상된다. 더구나 하청업체 연쇄도산이 예상돼 실업자와 부실채권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염증투성이의 실물부문에서 고름을 짜냄에 따라 한국경제의 환부도 그만큼 빨리 아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 은행 임원은 『부도가 나고 대량실업사태를 겪더라도 강력한 구조조정에 의한 것이라면 외국인들은 오히려 안심하고, 대외신인도는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 퇴출조치의 이같은 의미에도 불구, 55개 퇴출기업의 면면을 보면 일단은 「함량미달」이다. 「호랑이를 그리려다 고양이만 그렸다」 「몸통은 건드리지도 못한채 깃털만 뽑았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대마불사(大馬不死) 신화의 몰락을 바랐던 일반적 기대와는 달리 은행권이 살생부에 올린 기업중 「대마」는 찾기 힘들다. 따라서 1차 기업구조조정은 「모양갖추기」에 그쳤다는 것이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시작이 반이라는 말로 이번 조치를 평가해 달라』고 주문했다.
우선 5대 재벌 퇴출사중 간판기업은 하나도 없다. 예컨대 부실판정을 받은 삼성그룹 계열사중 이천전기 대도제약 한일전선 등은 그룹내에서조차 「우리 계열사가 맞느냐」는 반응이 나올 만큼 초라한 「주변기업」들이다. 대우 현대 LG SK 등도 거의 마찬가지다.
이는 퇴출대상에 재벌기업 포함여부를 둘러싼 정부내 혼선과 부실채권 증가에 대한 은행의 소심함이 빚어낸 결과다.
살생부 작업에 참여했던 한 은행 관계자는 『당초 재벌은 퇴출판정에서 제외했다가 대통령 지시로 뒤늦게 포함됐다』며 『큰 기업을 퇴출시키면 은행부실이 그만큼 늘어나는데 은행이 스스로 이런 결정을 하기는 어려웠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번 퇴출기업 선정과정에서 은행들은 해당 그룹과 「긴밀한 협의」를 거쳤으며 그룹측 입장이 상당부분 반영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5대 이외(6∼64대) 재벌의 퇴출기업도 대부분 이미 「사망판정」을 받은 업체들이 대부분이다. 동아건설의 동아엔지니어링, 해태그룹의 해태유통·전자·제과, 뉴코아의 뉴타운기획 시대축산 시대유통 등은 이미 부도가 났거나 정리가 확정된 업체들이다. 고합 효성 한일그룹 등도 이미 그룹의 구조조정차원에서 정리계획을 밝힌 기업들이 살생부에 올라갔다.
이번 부실기업 판정은 물리적으로 촉박한 일정, 은행이 보유한 기업회계자료의 불투명성, 재벌 및 협조융자업체 포함여부를 둘러싼 정부내 혼선, 은행들의 거래기업 눈치보기 등이 얽혀 결국 국민적 구조조정 기대수준을 충족시키지 못했다는게 일반적 평가다.
다만 사상 처음으로 재벌 계열사에 집단퇴출판정을 내렸다는 점에서 「배부르지 못한 첫술」의 위안을 삼아야 할 것같다.<이성철 기자>이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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