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숙한 극장공연에 짓눌려 사라져가던 추임새가/록콘서트·열린음악회 등 문화현장 곳곳서 살아난다폴란드의 실험적 연출가 그로토프스키는 「연극은 만남」이라고 했다. 그는 『(공연자가) 시험받는 것은 착상의 우수함이 아니라 실천』이라며 관객을 중시했다. 전통연희라면, 추임새는 너무 자연스럽다. 판소리와 탈춤, 「품바」같은 1인극, 마당극에서 얼씨구 절씨구 울고 웃는 관객이 없었던들 공연 자체가 성립했으랴. 소리판에서 관객이 맹하면 소리가 달라진다. 소리꾼들이 『중치 막혀 못하겠다』는 거다. 새전이 많을수록 작두를 잘 타는 굿판의 무당과 같다. 서구의 근대극장이 대화를 거부하고 환상을 낳았다면 추임새는 무대와 관객 사이의 직접적인 대화로 판을 끌어 간다.
「1고수 2명창」. 명창 나기보다 명고수 나기 힘들다는 뜻이다. 요즘 소리꾼들은 「1관객 2고수 3명창」이란다. 극장공연이 자리잡으면서 열린공간의 활발했던 추임새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잠시 눈을 돌려 보자. 추임새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옮겨 간다. 소극장과 운동장을 불문하고 광기 없는 대중음악콘서트가 어디 있으랴. 때로 무대의 완성도보다 객석의 안전성이 더 관심거리다. 「열린 음악회」는 그나마 점잖은 편. 거리의 퍼포먼스, 이벤트도 늘어나고 있다. 하물며 복제예술의 대명사인 영화마저. 컬트무비의 원조 「록키 호러 픽쳐 쇼」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누아트극장에서 영화를 똑같이 따라하는 「더블 픽처스」가 매일밤 공연된다. 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소리지르고 집어 던지고 대사를 따라 한다. 국내개봉을 앞두고 공연에 출연하는 조원희씨는 『여고괴담을 보면서 「안돼」하고 소리지르고 싶지 않느냐. 이는 한국의 마당극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추임새 역시 예술산업의 성쇠를 따라 흐른다.
그래선지 점잖기를 요구했던 극장공연에서도 이제 관객의 추임새를 다양한 형식으로 조직, 유도한다. 이강숙 노영심씨등이 출연한 「피아노가 있는 풍경」에서는 입장객에게 피리와 딸랑이를 나눠주었다. 「感(감)이 우리 속에 들어올 때」라는 공연은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며 극참여를 유도한다. 「추임새를 넣어주세요」라며.
추임새를 넣자. 문화를 응원하자. 이 응원은 축구를 보면서 저마다 작전을 지시하는 응원객들과는 달라서 직접 공연의 승부를 낸다. 단 마음만으로는 부족하다. 클래식계에서 「우박사」로 통하는 단골청중 우용근씨는 『도중 입장객, 삐삐나 휴대폰 소리, 여운이 사라지기 전에 터지는 박수등이 공연을 망친다』고 이야기한다. 오페라팬 김철상씨는 극장에 오기 전 음반으로 예습한다. 장르특성에 따라 훈련과 교육받은 이들이어야 가능하다. 그 교육은 공연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하다.<김희원 기자>김희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