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이 총체적 개혁을 위한 총진군 명령을 내렸다. 「방관경제」라는 신조어까지 사용해가며 금융구조조정은 물론, 그동안 시장원리를 존중해 적극적인 개입을 삼가해온 기업구조조정도 정부가 직접 칼을 대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반갑고 당연한 일이다.환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든 지난 6개월동안 온국민이 치른 고통과 희생에 비해 얻은 것은 너무도 없다. 개혁의 목소리는 요란했지만 행동이 뒤따르지 않아 「NATO(No Action Talk Only)국(國)」이라는 비아냥을 외국인들로부터 들어야 할 정도다. 무엇을 위한 고통이며, 누구를 위한 희생인가라는 분노에 찬 반문이 터져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김대통령은 정치·경제적 성과가 적지않았던 지난 방미기간중 중요한 연설기회마다 「시장경제와 민주화의 병행발전론」을 국정철학으로 표방해 미국 조야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가 실패한 원인도 물량적 경제발전만큼 경제적 민주화가 뒤따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도 한국경제의 현실은 대통령의 신념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정리해고와 임금삭감, 자산디플레로 급속히 몰락해가는 중산층, 밤마다 남대문 서울역 일대 지하도를 가득 메우는 노숙자, 수천억씩 협조융자를 받는 대기업들의 그늘에서 신음소리도 못내며 쓰러져가는 중소기업들…. 한국경제의 고질적 병폐인 불균형과 불평등 구조는 나아지기 커녕 도리어 악화하고 있다.
IMF의 고금리정책으로 금리가 30%수준까지 치솟아 일부 금융자산가들의 금고에는 이전보다 배가 넘는 이자소득이 쌓이고 있으나 정작 이들이 내야하는 세금은 도리어 줄어드는 기현상마저 벌어지고 있다. 투자재원 마련에 급급했던 정부가 금융소득종합과세의 시행을 올해부터 유보해 버렸기 때문이다. 고통의 분담이라는 말은 공허한 메아리일뿐이다.
앞으로의 개혁이 지난 6개월간의 시행착오를 반복한다면 우리에게는 정말 미래가 없다. 계속되는 일본엔화의 폭락과 이에 따른 중국 위안화의 평가절하 가능성등으로 언제 제2환란을 맞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더이상 개혁이 지체된다면 경제회생의 기회는 영원히 우리 손을 떠나게 될 것이다.
대통령이 말했듯이 우리 사회는 지금 총체적인 개혁을 필요로 하고 있다. 경제적 부실은 온몸 구석구석이 썩고 병든 우리 사회의 드러난 환부일 뿐이다. 수술은 이제 시작이고 끝을 기약할 수도 없다.
갈길은 멀고 시간은 없는데도 개혁의 수레바퀴는 좀처럼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대기업들은 과감한 구조조정을 하기보다는 재벌체제의 효율성을 주장하며 선단식 경영구조를 바꾸려하지않고 금융계는 자기만 살기 위한 눈치보기에 급급하다. 『개혁의 속도를 높이기위해서는 졸속도 필요하다』는 말이 나올만 하다.
하지만 개혁이 제자리를 맴도는 이유가 과연 기업과 금융개혁의 부진때문일까. 아니다. 진정한 이유는 정부 스스로가 개혁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이뤄져야 할 공공개혁이 선행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서슬퍼렇게 민간에 구조조정을 다그치고 있는 정부 자신이 실상은 구조조정을 가장 기피하는 장본인이다. 신정부 출범이후 그렇게 요란하던 정부조직 축소는 최소한의 모양새도 갖추지 않은채 넘어갔고 정부산하기관은 물론 심지어 정부출연 연구소의 통폐합 작업조차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자신은 손톱하나도 건드리지 않으면서 도대체 정부는 무슨 염치로 민간에 팔 다리를 과감히 자르라고 강요한단 말인가. 정부개혁부터 제대로 하고 개혁을 이야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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