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敗者 정주영 출국금지’ 공항의 수모/검찰출두과정 봉변·10여차례 법정서는 시련도/정계은퇴후도 YS진노 안풀려 경영퇴진 등 화해 총력/CY “나의 낙선은 YS선택한 국민의 실패” 회고93년 1월14일 오후 3시 김해공항. 검은색 오버코트차림의 정주영(鄭周永) 현대 명예회장이 출국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이날 정오부터 내린 폭설로 차가 밀린 탓에 예약을 해둔 오사카행 비행기가 떠나버린 직후였다. 정명예회장은 비서 한사람만 데리고 오후 4시께 출국수속을 다시 밟았다. 출국장 문을 지나 세관검사대는 무사히 통과했지만 법무부 출국사열대앞에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죄송하지만 출국정지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돌아가셔야겠습니다』 공항순찰대 직원의 보고를 통해 정명예회장의 출국 움직임을 포착한 검찰이 출국정지명령을 내린 것이다. 수행을 했던 김인재(金仁載) 차장과 법무부 직원간에 실랑이가 벌어졌고 묵묵히 지켜보던 정명예회장은 그대로 돌아서서 국내선 귀빈실로 걸어갔다.
15일 오전 10시 검찰에 출두한 정명예회장은 패자의 참담함을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쏘나타 승용차편으로 서울지검에 도착한 정명예회장은 취재진의 카메라에 부딪쳐 이마가 1㎝가량 찢어지는 변을 당하기도 했다. 정명예회장은 이마에 흐르는 피를 손수건으로 닦아가며 무려 10시간에 걸쳐 조사를 받았다.
국민당 대변인을 지낸 인연으로 정명예회장의 변호를 맡았던 변정일(邊精一) 의원의 회고. 『공소사실이란 게 수긍하기 힘든 것들이었죠. 실정법 위반으로 보기 힘들었습니다. CY가 당원교육을 하면서 「멕시코는 경제전문가인 살리나스가 대통령이 되면서 경제가 부흥했다. 우리나라도 경제를 아는 사람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것을 사전선거운동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시련은 이렇게 시작됐다. 정명예회장은 93년 11월 대선법 및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 위반혐의로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94년 7월 항소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아 교도소 신세만은 면했다. 그러나 정명예회장은 문민정부동안 대선법 위반과 횡령혐의로 10여차례 법정을 드나들어야 했고 비자금 사건에서도 출두해야 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정명예회장에게 대선이후 5년간은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긴 터널이었을 것이다.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오기 위해 화해제스처와 시그널을 YS에게 보냈다. 정명예회장 자신은 물론 현대그룹도 화해를 지상목표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 셈이다.
우선 정명예회장은 검찰출두 이후 정계은퇴의 수순을 밟았다. 1월말 정계은퇴선언에 이어 2월 중순 국민당 탈당계를 제출했고 의원직을 사퇴했다. 신한국건설동참을 명분으로 국민당의 왕당파(정대표와 가깝게 지낸 의원들)들은 대거 신한국당으로 당적을 옮겨가도록 지시했다.
현대그룹도 93년 한해동안 신경제 100일계획 실천과제 발표, 금융실명제 적극 협력 발표, 노무관리 중심체제로 대전환 등 신정권에 대한 화해 조치들을 연달아 발표했다.
그러나 김대통령의 진노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전 청와대비서관의 증언. 『청와대는 현대의 노사분규로 상당히 애를 태웠지요. 대통령은 비서실장과 경제수석을 수시로 호출해 「현대 어떻게 됐어. 노사분규가 풀릴 기미가 있어?」하며 챙기곤 했지요. 그러다가 정명예회장이 7월 중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와 경영에 복귀하겠다고 하자 대통령은 대로했습니다. 노사분규도 챙기지 못하면서 경영에 복귀하겠다고 하니 화가 났던 겁니다』 신경제정책이 실패할까 하는 우려와 정명예회장에 대한 감정이 교차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결국 정명예회장은 94년 5월 경영일선퇴진이라는 카드까지 내밀었다. 이후 정명예회장은 아산재단을 통해 사회활동에만 전념하는 모양새로 남은 세월들을 보내야 했다.
현대그룹은 일방적으로 죽어지내는 것만이 문제를 풀 수 없다고 판단하고 다각도로 「작전」에 돌입했다. 대외적으로 정부의 조치를 최대한 수용한다는 입장을 세웠지만 다른 그룹과의 형평성 문제, 현대에 대한 제재의 부당성을 제기하면서 명분쌓기에 들어갔다. 물밑으로는 사장단과 임원진을 동원해 청와대와 관계요로를 통해 분위기 조성과 설득작업에 전력투구했다.
현대그룹 계열사 사장의 회고. 『정명예회장의 경영일선 은퇴 이후 대정부전략은 다양한 차원에서 진행됐습니다. 워낙 대통령의 감정의 골이 깊어 일방적인 화해제스처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판단이었지요. 그룹문화실은 아시아 5대기업인 선정, 2년 연속 종합소득세 납부 1위 등 명예회장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하는 한편 세계 127대 파워그룹 선정, 공익법인 출자 1위 등 그룹의 입지를 확대하기 위해 애를 썼지요. 신문지면을 통해 형평성을 제기하면서 그룹에 대한 동정심리를 유발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밖에 사장단과 임원진들은 청와대 관계자들과 어울려 공사석을 막론하고 그룹제재해제에 대한 당위성을 역설했습니다. 현대그룹 전체가 화해를 이끌어 내기 위해 전력투구한 셈이지요』
역사에 가정은 없다. 그러나 정명예회장의 정치참여와 대선 그리고 정치은퇴와 현대의 시련의 과정을 되돌아보는 관계자들은 흐름마다 여러가지 선택들이 있었고, 그 변수에 따라 재계의 향배와 나라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국민당 고위당직을 지냈던 한 의원의 증언. 『당시 정주영후보의 선택은 정치사를 바꿔 놓을 수 있었다고 봅니다. 국민당이 그대로 존속했다면 자민련은 태어나지 않았고 정치판도가 지역구도로 흐르지도 않았을 겁니다. 아직 여건이 성숙하지 않은 상황 때문에 변혁이 가능했던 정치실험이 실패로 끝난 셈입니다』
현대 고위 관계자. 『경제가 이처럼 파탄이 나다보니 국민당이 집권했더라면 혹은 당시 YS의 손을 들어주고 대신 경제에 대한 자문을 옆에서 건네 줄 수 있는 상황이라도 됐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좀더 실현 가능했던 가정은 대선이후 정후보의 선택에 관한 것이다. 대선패배이후 처음으로 정후보가 출석한 1월의 당직회의에서 강경대응방안이 대두됐었다. 당시 당직자의 회고. 『박철언(朴哲彦) 최고위원 등 일부 당직자들은 정치를 계속하는 것만이 정후보는 물론 국민당 현대그룹이 모두 사는 길이라는 논리를 강하게 피력했습니다. 정후보가 현대와의 단절을 선언하고 정치인의 길을 계속 갔다면 국회 교섭단체를 거느리고 있고 18%이상의 지지를 얻은 정후보가 짓밟히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였지요. 개연성이 있는 논리였지만 가족과 현대 관계자들이 말리는데다 정신적 타격을 받았던 정대표로서는 일신을 추스르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게 문제였지요』
문민정권이 지난 다음 털어놓은 당사자 정명예회장의 아쉬움도 만만치않다. 정명예회장은 최근 출간된 회고록 「이땅에 태어나서」에서 자신의 심경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대선 출마당시 민자당이 재집권하면 외채가 1,200억달러에서 1,60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는데 불행하게도 이 말은 현실로 나타나 97년말 예상외채는 1,350억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대선의 낙선을 두고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고 주장하던 내 인생의 결정적인 실패라고 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쓰디쓴 고배를 들었고 보복차원의 시련과 수모를 받았지만 나는 실패한 것이 없다.…내가 낙선한 것은 나의 실패가 아니라 YS를 선택했던 국민들의 실패이며 나라를 이 지경으로 끌고온 YS의 실패다. 나는 그저 선거에 나가 뽑히지 못했을 뿐이다. 후회는 없다』<이재열 기자>이재열>
◎현대·삼성 엇갈린 명암/현대 매출 1위 자리 탈락/문민정부 5년간 고난의 길/삼성은 자동차진출 등 약진
재계의 선두주자 현대와 삼성은 문민정권동안 명암이 극명하게 엇갈렸다.
현대는 정주영(鄭周永) 명예회장의 정치참여에 대한 원죄로 고난의 길을 걸은 반면 삼성은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우선 매출에서 현대는 대선이후 삼성에 밀리기 시작했다. 91년이후 93년까지 연간 5조원정도 앞서던 현대의 매출은 93년 삼성과 비슷해졌고 그 이후 삼성에 정상의 자리를 내주었다.
투자의 측면에서도 삼성의 독주는 두드러졌다. 94년 삼성이 5조원에 이른 반면 현대는 4조4,000억원이었고 95년에는 7조5,000억원 대 5조8,000억원으로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그러나 정작 두 그룹의 엇갈린 명암은 분위기에서 확연했다. 삼성은 정부에 화답하는 선도그룹으로 정부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번갈아 조치를 내놓으며 재계의 움직임을 이끌었다. 이건희(李健熙) 회장의 신경영은 물론 국가를 이끄는 의식도 기업이 바꿔가야 한다는 국가경영론이 삼성의 이념으로 채택될 정도였다.
이같은 분위기에 힘입어 삼성의 1등주의는 굳건해졌고 사업분야에서도 엄청난 약진이 있었다. 삼성은 숙원사업이던 승용차 사업에 진출(94.12)했고 재벌들이 각축을 벌였던 한국비료를 인수(94.7)했으며 유통업 진출을 위해 분당서현역사를 수주(94.4)했다. 이회장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위원에 선임(95.6)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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