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기∼컴퓨터시대 화폐/800여장의 사진·그림 수록/지루함없는 문화탐험 유도『만일 쇠로 돈을 만들었다면 그것으로 칼 도끼 끌 따위를 만들 수 있으니 어느 정도 가치를 부여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이런 부류(지폐나 동전)라면 그 속에는 아무 가치도 없다. 어떤 사람이 고구마가 필요 이상으로 많다면 돼지나 나무껍질 옷감과 교환할 수 있다. 돈은 다루기 쉽고 실용적이지만 저장해도 썩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그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지 않고 비축해둠으로써 이기적이 된다. 반면에 한 사람이 가진 것 중에 음식물이 가장 소중하다면 그것은 비축해둘 수 없으므로 다른 유용한 물건과 바꾸거나 아무 대가없이 이웃이나 소(小)추장들이나 그가 돌보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다』(216쪽). 남태평양 통가섬 추장 피노우는 이처럼 서양의 화폐가 어떻게 공동체적 사회관계를 파괴하는지를 냉철하게 꿰뚫어 보았다.
피노우추장의 통찰을 카를 마르크스는 이미 1848년 「공산당선언」에서 예견했다. 『부르주아들은 인간과 「그의 타고난 상전」(왕, 귀족등)을 묶어놓았던 잡다한 봉건적 관계를 무자비하게 끊어버렸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무감각한 「현금지불」 외에는 다른 어떤 관계도 남겨 놓지 않았다』(235쪽).
대영박물관 화폐전시관 큐레이터이자 로마·철기시대 화폐전문가인 조너선 윌리엄스가 편찬한 「돈의 세계사」는 기원전 3,000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돈의 형태, 제조기술, 목적, 문화적 역할등을 역사적으로 고찰한다. 흥미로운 탐험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해 고대 그리스와 이집트, 로마를 거쳐 중세유럽, 이슬람세계와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로 이어진다. 이 탐험이 전혀 지루하지 않은 것은 컬러사진 200여장을 포함한 800여장의 사진과 그림이 돈의 문화사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어판은 97년 1월 대영박물관 화폐전시관 개관과 동시에 나왔다. 이 책은 종교 문학 전쟁과 함께 인류의 공통화제중 하나인 돈을 소재로 여러 문화의 같고 다름을 살펴보자는 취지에서 기획됐다. 특히 전자상거래등 「화폐없는 사회」로 가는 시점에서 이 책은 돈의 역할이 시대마다 다르다는 역사적 이해를 심어준다. 서구식 돈의 개념, 즉 무엇이든 돈으로 가치를 매기고 교환할 수 있다는 개념도 역사적으로 보면 특정한 시기에 우세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까치. 1만2,000원.<이광일 기자>이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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