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슬은 울렸다. 라이트는 꺼졌다. 환호와 열광, 탄식과 아쉬움을 뒤로 하고 그라운드는 다시 적막에 잠겼다.속은 기분이다. 소주 한 잔에 오징어 다리를 씹으며 그토록 목터지게 응원했건만. 서울역의 노숙자도, 고개 숙인 가장도, 허리띠를 졸라맨 아내도, 칭얼대던 아이들도 모두 한 마음이 됐던 그날 밤이었다. 종합시청률 78.9%. 사상 최고 기록이었다.
이제 무슨 재미로 사나? 사람들은 살 맛이 안 난다고 한다. 경기가 끝난 일요일, 유원지에 사람이 줄고 성미 급한 젊은이들은 남의 승용차에 분풀이를 하다 경찰서 신세를 졌다. 허탈 뒤에 오는 것은 비판이다. 아니 비난이다. 주전들을 왜 벤치에 두었느냐, 백태클의 위험성을 선수들에게 주지시키지 못했느냐, 투지가 없었다, 감독은 책임져라…
월드컵 사상 첫 승도 한 번 못 올려봤는데 마치 16강 티켓을 딴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상술(商術)과 일부 언론은 국민적 열망을 부추겼다.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IMF 귀신이 든 지난해 말부터 어디 신바람 나는 일이 한 가지라도 있었던가? 대포알 같은 멋진 중거리 슛은 서민들의 답답한 가슴을 뻥 뚫어주었을 것이다. 승전보는 분출(噴出)의 이벤트가 필요한 우리사회에 청량제가 되었을 테고, 실의에 잠긴 이들에게는 재기의 용기를 불어 주었을 지 모른다.
축구 한 판이 국가의 분위기를 바꾸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특히 월드컵은. 시사주간지 타임 최신호는 월드컵은 전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벌어지는 「국가간 전쟁」이며 현대판 「검투장」이라고까지 비유했다.
66년 영국에서 열린 제8회 월드컵대회. 연장까지 가는 접전끝에 42로 잉글랜드가 독일을 이기자 영국인들은 이렇게 열광했다. 『투 월드 워(Two World War), 원 월드컵(One World Cup)』 1·2차 세계대전에서도 승리했고 월드컵도 이겼다는 국가적 자존심의 외침이다.
69년 월드컵 예선전에서 엘살바도르는 온두라스에 32로 승리했다. 몇 주 뒤 두 나라는 실제 전쟁에 돌입했다. 반드시 축구가 원인이 된 것은 아니라고 할 지라도 민족간 적대감이 축구로 인해 극대화 했음은 분명하다. 22일 벌어질 F조 미국과 이란의 경기에는 벌써부터 세계적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일전」의 경우처럼 축구에는 스포츠 외적인 시각이 깔려있는 것이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는 축구에 있어서만은 결코 영원히 「한 나라」가 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축구는 정직한 만큼 난폭하다. 오직 승리만이 최고의, 유일한 가치다. 85년 브뤼셀에서는 흥분한 관중끼리 난투극을 벌여 39명이 숨졌다. 89년 영국 셰필드 경기장에서는 관중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담이 무너지는 바람에 95명이 깔려 죽었다. 축구는 사람을 「죽이는」 유일한 스포츠다.
정치가 할 수 없는 일을 축구가 하기도 했다. 1914년 크리스마스. 영국과 독일군은 전선의 참호에서 나와 축구 경기를 했다고 한다.
참으로 오묘한 게 축구의 세계다. 가장 단순한 스포츠이면서 정치적이고, 사회적이며 종교적인 이벤트이자 의식이다. 공(球)이 총(銃)이 될 수가 있고, 한 뼘의 그라운드가 국가적 컨센서스(일치)의 장(場)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때로는 집단적 광기(狂氣)로 표출되고 「축구 허무주의」가 싹튼다.
그렇다면? 축구가 나쁘다는 것인가? 좋다는 말인가? 아무 쪽도 아니다. 그냥 축구를 축구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그래야 21일 새벽 편안한 마음으로 소주 한 병 차고 다시 TV 앞에 앉을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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