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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제에서 환란까지:12(문민정부 5년: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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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제에서 환란까지:12(문민정부 5년:34)

입력
1998.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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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집사건 터지자 YS “그냥둘수 없다”/YS­CY “입당 권유” 우호적관계 제휴설 싸고 금가/유세 毒舌공방 “이무기” 공격·건강뒷조사 맞대응/現重비자금 폭로에 ‘복집’역공,결정적으로 돌아서95년 8월20일 상오 9시50분. 청와대를 들어서는 정주영(鄭周永) 현대 명예회장은 다소 긴장된 표정이었다. 대선이후 3년이 지나 김영삼(金泳三) 대통령과 공식적으로 해원(解怨)의 의식을 갖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김석우(金錫友) 의전수석의 영접을 받으며 엘리베이터를 이용, 2층 대기실에서 면담시간을 기다렸다. 통상 각료급이상 내방자에게나 나가는 의전수석 영접이나, 93년 9월 방한한 프랑스 미테랑대통령에 이어 두번째로 엘리베이터를 이용토록한 점 등으로 미루어 연로한 정회장에게 배려한 흔적이 역력했다.

10시 정각, 한승수(韓昇洙) 비서실장의 안내로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섰다.

두사람은 사진기자들이 촬영하는 5분동안 주로 건강과 운동을 화제로 얘기를 나누었다. 먼저 김대통령이 악수를 청하며 『반갑습니다. 몇년만이지요』라고 인사를 건네자 정씨는 『만난지 한참된 것 같습니다』라고 답했다. 김대통령은 정명예회장에게 건강에 유의해달라는 말을 한 뒤 『다행히 동생과 자제분들이 많이 활동하니까 든든하시겠습니다』라고 화제를 이어갔다. 덕담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배석자를 물리치고 진행된 단독요담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회동직후 김대통령은 윤여준(尹汝雋) 공보수석에게 『모두 힘을 합쳐 경제발전을 이루어 일류국가의 토대를 마련하자』는 취지의 대화내용을 불러주고 발표토록 지시했다. 23분에 불과한 짧은 만남 이후 청와대를 나서는 정명예회장은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지만 YS와 보낸 3년간 애증의 세월들은 지울 수 없었다.

정치 9단, 경제 9단으로 불리면서 정치와 실물경제의 영역에서 누구보다 도전적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의 인간관계는 기구했다.

정명예회장이 92년초 통일국민당을 창당, 14대 총선에서 약진했을 때만 해도 두사람은 껄끄러운 사이가 아니었다. 당시 정명예회장은 공석에서 민자당의 대권후보였던 김대통령을 여전히 「깨끗한 정치인」이라고 추켜올렸고, 김대통령측도 그의 정치참여를 못마땅해 하면서도 「훌륭한 기업인」이라고 화답했다. 정명예회장의 정치참여 이전 두사람은 사석에서도 가끔 만났었고 정명예회장은 YS를 국민당의 대통령후보로 옹립할 생각까지 가졌을 정도로 관계가 좋았다고 측근들은 밝혔다. 김동길(金東吉) 전 국민당 최고위원의 설명. 『창당직후 정주영씨는 YS에게 「민자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못받을 게 뻔한데 우리당에 와서 대통령 후보하는게 어때요」라며 국민당 입당을 권했어요. 그말에 YS는 「정회장, 내가 틀림없이 될테니 공천받으면 좀 도와줘요」라고 했습니다』

두사람 관계는 어디에서부터 어긋났을까. CY(정회장)가 대선에서 중도사퇴해 YS의 손을 들어줄 것이라는 YS­CY의 제휴설이 엇갈림의 출발점이라는게 정설이다. 국민당 고위 당직자를 지낸 현직의원의 증언. 『92년 7월24일 있었던 YS­CY 회담은 외양상 결렬로 끝났지만 실제로는 대선문제, 현대에 대한 정부규제 등 상당히 깊숙한 논의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두사람간에 오간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정치적 타협책이 불가피했다는 얘기지요』

탈세사건으로 구속됐던 정몽헌(鄭夢憲) 현대상선 부회장 등 8명의 관련자들이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금융제재의 일부가 풀리면서 YS­CY의 제휴설이 서서히 고개를 들던 시점이었다.

두사람의 「밀약」은 이를 두사람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이용하면서 어긋나기 시작했다. 현대그룹 고위관계자로 재직중인 CY 측근의 회고. 『두사람 사이에 오간 얘기는 당시 안기부를 통해 노태우 대통령에게 알려졌고, YS는 이를 십분 활용해 노대통령이 자기 손을 들어주도록 압박을 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후보를 주지않는다면 탈당해 정후보와 손잡겠다고 위협했다는 얘기지요. CY도 중간에 관둘려면 왜 시작했느냐고 당직자들에게 상당한 압박을 받았지만 현대에 대한 제재, 그리고 무엇보다 아들인 몽헌부회장의 실형가능성 때문에 모종의 타협을 하지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어쨌든 제휴설을 전후해 두사람은 상당히 불쾌한 사이가 됐다는 것은 분명하다. 대선 당시 YS 핵심참모의 증언. 『YS는 CY에 대해 배신감과 함께 믿을 수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총선직후 정씨가 찾아와 「김총재님 걱정마십시요. 나는 절대로 대권도전은 안하겠습니다」라고 약속했는데 돌아가서 말을 뒤집었고, 대선전 단독회동에서도 중도사퇴의 뉘앙스를 풍겼으면서 끝까지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선중반 최대 화제였던 두사람의 독설공방은 인신공격으로까지 나아가면서 회복하기 힘든 깊은 감정의 골을 팠다. 「용이 되다만 이무기」「밥상머리 교육」등 원색적인 표현으로 정후보는 YS를 물고 늘어졌고, YS 또한 돈으로 권력까지 사려한다는 강도높은 비난과 함께 CY를 죽이기 위해 건강문제 등을 비롯한 뒷조사에 골몰했다.

두사람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악화한 계기는 대선직전에 터진 현대중공업 비자금 사건과 부산복집 사건. 대선직전인 12월5일 현대중공업 경리부 직원이었던 정윤옥(鄭允玉)씨가 현대중공업이 350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해 이중 220억원을 국민당에 제공했다고 폭로했다.

국민당 고위당직자는 중공업 비자금 사건은 수직상승한다고 믿고있던 국민당을 대내외적으로 좌절시킨 계기였지만 조작의 냄새가 짙다고 회고한다. 『현대중공업 비자금 사건은 선거를 앞두고 수세에 몰린 YS진영에서 사주해 터뜨린 정치적 사건입니다. 폭로 기자회견이 새벽 1시30분에 열린 사실이나 경찰이 회견장을 삼엄하게 경비한 것 등이 증거입니다』

이 관계자는 대선에서 등을 돌렸던 이명박(李明博) 의원 배후설을 제기했다.

『소상하게 그룹의 자금흐름을 알고 있다는 점과 과거 부하직원이었던 현대건설 중역에게 양심선언을 요구했다 거절당한 점 등의 정황으로 보아 이의원이 배후로 지목됐었습니다. 후일 자신도 아랫사람으로부터 배신당한 것을 보면 인과응보인 셈이지요』

국민당의 카운터 펀치였던 부산복집 사건은 YS의 측근 참모중에서 『일을 그르치게 됐다』면서 쓰러지는 사람까지 나올 정도로 파장이 컸다. 「우리가 넘이가」라는 영남권 유권자의 공감대를 자극한 YS측의 역공으로 오히려 호재로 변했지만 YS로 하여금 「절대 그대로 두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각인시킨 계기였다. 2년 3개월이나 재판을 벌였던 부산복집 사건은 정몽준(鄭夢準) 의원이 선고유예판결로 유죄, 모임을 주도했던 김기춘(金淇春) 전 법무부장관은 공소취소로 정치적 결말을 보았다.

12월18일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국민당의 참패로 끝났다. 창당한지 1년도 되지않은 정당이 18%의 유효 득표를 얻은 선전이었지만 승리를 장담했던 CY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한때 서로를 인정하고 손을 잡을 수도 있었던 두사람의 관계가 칼자루를 쥔 자의 의지에 의해 휘둘리는 냉엄한 승자와 패자로 갈라선 순간이었다.<이재열 기자>

◎YS 피말린 재계 3人/정주영·박태준·김우중 ‘과거청산’ 대상으로/문민내내 인고의 세월

김영삼(金泳三) 대통령 측근들은 대통령이 되기까지 김대통령의 피를 말린 재계 인사 세사람이 있었다고 말한다. 말할 것도 없이 정주영(鄭周永) 현대 명예회장과 박태준(朴泰俊) 자민련 총재, 김우중(金宇中) 대우그룹 회장이다. 세사람에 대한 감정은 문민정권동안 강력한 재벌정책의 배경이 되었다는 게 측근들의 생각이다.

정명예회장은 물론 나머지 두사람도 김대통령으로부터 「과거청산」의 대접을 톡톡히 받았다.

박총재는 YS와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 사이에서 항상 YS를 괴롭히는 입장에 섰다. 후보경선을 포기했지만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달라는 김대통령의 청을 거절하고 이종찬(李鍾贊) 의원의 편을 들었다. CY(정회장)와 만나 지원을 약속했고 민자당 탈당의원들을 국민당에 가도록 막후에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포철에 대한 세무사찰이 시작됐고 불안속에 국내외를 들락거리던 박총재는 25년간 자신이 일궈온 포철에서 손을 털고 일본으로 떠났다. 주총결과 박전회장측근들까지 모조리 추방됐다.

대우 김회장은 대선 중반이었던 10월29일 대선출마포기선언을 통해 직격탄을 비켜갔지만 대선출마 움직임은 물론 경기고 인맥을 통해 이종찬 의원을 지원했다는 점에서 미운 털이 박혔다. 김회장은 결국 문민정권동안 두차례의 비자금사건으로 검찰에 여러차례 불려다니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세계 경영」을 내세워 국내보다는 해외로 나돌아야했던 것도 김대통령에 대한 감정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세사람은 정권교체 이후 승승장구, 격세지감을 실감케하고 있다. 현대그룹은 재계의 수위자리로 복귀했고, 박총재는 여권 핵심으로 YS의 경제실정을 단죄하고 있으며, 김회장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에 오를 예정이다.

◎정주영 정치참여 연표

▲91.12 신당창당 의사표명

▲92. 1.10 통일국민당 창당발기대회

▲ 2. 8 국민당 창당대회

▲ 3.24 14대 총선(31석 획득·3당 부상)

▲ 4. 3 대통령선거 출마의사 표명

▲ 4. 4 현대그룹에 대한 주주권 행사 포기 공증

▲ 5.15 대통령후보로 선출

▲ 11.16 새한국당과 합당선언

▲ 12. 5 현대중 여직원 비자금폭로

▲ 12.17 한은 3,000억원 발권발언을 명예훼손으로 고소

▲ 12.18 14대 대선(3위)

▲93. 1.13 검찰 비자금관련 출두요구

▲ 1.14 출국금지 일본행 시도

▲ 1.15 서울지검 출두

▲ 2. 6 검찰 불구속기소

▲ 2. 9 정계은퇴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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