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문화원장 여성임명 안된다?/부임준비중 소식듣고 “한국선 부적절” 한때 강한 반대/뒤늦게 판단잘못 깨닫고 한국의 女權신장·여성활약 감명/그러나 ‘어머니’로 대표되는 가족전통 훼손되지 않길 바라여성의 변화하는 역할과 외교관 생활과의 상호관계에 대한 첫 일화는 워싱턴에서 서울로의 부임을 준비하던 중에 일어났다. 찰스 윅 미 공보처장(해외에서는 미 공보원(USIS)으로 불린다)은 대구 광주 부산의 세 문화원장에 공보처의 세 여성을 임명했으며, 그들은 이미 언어교육을 마쳤고, 또 매우 전도유망한 간부들이라고 나에게 알려줬다. 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는 한국민들은 그런 책임있는 자리에 여성을 앉히는데 익숙지 않기 때문에 적절치 않다고 설명했다. 문화원장은 아마 「키와니스」나 「로터리」같은 민간 사교단체에 가입해야 할 것이고, 그럴 경우 한국사람들은 그 여성들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윅은 결정은 이미 내려졌고, 이를 바꿀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미국의 여성지도자들로부터 엄청난 압력을 받았을 것이었다. 오랫동안 한국에서 살았고, 또 한국민과 오랜 친분을 쌓아온 나는 이것이 별 실효성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는 『한번 두고 봅시다』라고 대답했다.
내 훌륭한 친구이자 한국에서 오랫동안 공보원 관리로 지낸 버나드 러빈은 서울에서 문화원일을 총 관장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이같은 당황스런 느낌을 전했다. 그는 나의 이같은 우려를 이해하면서도 정부의 충성스런 관료로서 기회를 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내 판단이 이렇게까지 틀린 것은 일찍이 없었다! 세 여성관료는 자신들의 임무에 정말 놀랄정도로 잘 적응해, 미국이 능동적인 역할을 여성에게 부여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세 문화원장은 매리 컬린, 모린 테일러, 그리고 프랜시스 설링거로, 「버니(버나드의 애칭)의 천사들」로 불렸다. 나는 여성의 변화하는 역할은 세계적 추세이며, 한국도 그 발전의 한 부분이라는데 익숙해졌다.
98년 봄, 나의 옛 제자이자 지금은 각별한 친구인 이경숙(李慶淑) 박사가 숙명여대 총장에 다시 임명됐다. 사람의 직업중 가르치는 일이 왜 가장 보람있는 일인가에 대한 또하나의 이유는 바로 재능있는 제자의 성공때문이라고 말할수 있다. 전에도 말했듯이 이경숙 박사는 국회 외무위원회의 첫번째 여성위원이었고, 교수로서 많은 존경을 받았으며, 한국에서 여성이 보다 공정하고 존중되는 대접을 받는데 많은 기여를 한 지도자였다.
2년전인 96년 5월4일 이 총장은 사우스 캐롤라이나 대학에서 그녀의 두번재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때 그녀는 학위수여식 연설자였다. 그녀의 졸업연설이었던 「21세기 여성과 지도력…한국여성의 전망」은 사우스 캐롤라이나 대학에서 열정적인 환호를 받았다. 그녀는 전세계 여성들의 변화하는 지위에 대한 몇가지 중요한 점을 지적하면서, 한국의 여성운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여성들은 아직 정책결정의 자리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수세기동안 내려온 차별의 결과입니다. 차별의 상당부분은 전통적 유교가치에서 기인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정당이 여성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데 매우 고무적으로 느꼈다.
나는 주의깊게, 그리고 자랑스럽게 이박사의 연설을 경청했다. 그것은 곧 내가 수년동안 경험했던 일들을 생각나게 했다. 내 생각이 여러 사건에서 사람들로 넘나들면서, 나는 국외자(局外者)로서 진행중인 혁명을 지켜봐왔다는 것을 의식할수 있었다. 97년 두어번의 방문중 나는 동료에게 길거리나 고속도로에서 운전하는 여성을 매우 많이 볼수 있다는 것에 대해 언급했다. 번드르르한 컨버터블에 매우 세련된 모습을 한 젊은여성들도 몇몇 있었다. 60년대는 여성이 운전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수 없었다. 우리가 지금 목격하는 것은 오랜 역사를 통해 많은 여성이 보여준 모험과 지도력의 결과물이다.
86년 7월1일 이화여대는 창립 10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훌륭한 친구인 정의숙(鄭義淑) 총장이83년 10월 미얀마 랑군폭탄테러사건 직후 여의도에서 열린 추도식에서 내가 지금까지 들어온 어떤 것보다 감동적인 연설을 했는데축하연설을 했다. 연설에서 그녀는 학교를 더욱 발전시킬 것이며, 『하느님과 진실의 편에 남을 것』을 맹세했다. 그녀가 『인간해방』과 함께 하는 실용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을 때, 그녀가 뜻하는 바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화여대는 유구한 세월동안 한국여성의 기회를 증진시키는 최전선에 서왔다. 많은 학계지도자들처럼 그녀는 정부의 권위주의적 정책에 대해 안타까워했으나 국제화 자유 세계평화를 증진시킬 것을 맹세했다. 한국의 전통가치가 변화하는 세계가치와 충돌할 때 생기는 어려움을 그녀가 인식하고 있을때, 민주주의를 향한 그녀의 헌신적 노력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여자대학 경쟁학교의 이경숙씨가 이룩한 업적에 자부심을 갖는 것처럼 정의숙씨의 역할을 기억했다.
나는 다른 한사람의 경이로운 한국여성지도자를 생각했다. 아내와 나는 그녀와 함께 많은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가정법률상담소의 이태영(李兌榮) 소장이었다. 그녀와 그녀의 아들 정대철(鄭大哲)씨는 김대중(金大中)씨와 민주주의를 위한 그의 활동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였다. 투옥된 김대중씨의 아내 이희호(李姬鎬)씨가 남편 석방을 탄원하기 위해 대사관에 왔을 때, 그녀는 이희호씨와 함께 왔다. 그해 초 서울대학교에서 내가 명예박사학위를 받을때, 그녀는 미국에 있었으나 다음과 같은 내용의 축하전문을 나에게 보내왔다. 『서울대학교와 제가 학부과정을 마친 드루(Drew)대학교의 동창생으로서 동료 동창생에게 진심어린 축하를 보냅니다』 84년 12월13일 대사관저 옆에 있는 정동감리교회에서 있은 그녀의 서품(敍品)식에 참석할수 있어 정말 기뻤다. 그녀는 84년 「감리교신자 세계평화상」(Methodist World Peace Award)을 수상했다.
그 행사에 대한 내 논평에서 나는 한국에서 처음이며 존경받는 여성의 한사람으로서 인권을 위해 그녀가 보여준 용기있는 지도력을 칭찬하고 지지했다. 나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민주주의와 정의라는 대의(大義)를 향한 그녀의 조용하면서도 결의에 찬, 명민하면서 헌신적인 노력은 그녀가 한국이라는 국경을 넘어 광범위한 인지도를 얻을수 있게 했습니다… 이 상이 그녀가 지금까지 받은 박수갈채를 더욱 확장시킨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특히 이 상이 인권주간중에 나온 것은 적절한 것입니다… 우리 미국민은 인간에의 관심을 지지하며, 이태영씨는 특히 이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습니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이태영씨의 노력은 또한 한미관계를 증진시키는데에도 도움이 됐습니다』
나의 이 말중 상당부분은 청와대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사관의 언론·출판 담당자가 인권을 강조하는 나의 논평을 복사해 배포했는데도 불구하고 서울의 언론들은아마도 언론지침에 의해 통제받고 있었겠지만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는 또 김대중씨같은 민주투사를 위해 미국에서 싸우는 몇몇 한국인들이 내가 한국에서 인권을 위해 아무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비판하게 했다. 그날 정동감리교회에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강하게 언급해준데 대해 나에게 감사했다.
84년 12월 그날의 나의 언급은 또 이태영씨 노력의 또다른 면을 높이 평가했다. 그것은 이 회고록의 한 소론(小論) 주제이다:
『미국민은 여성과 가난한 자의 권리를 위한 이태영씨의 헌신적 노력을 깊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한국으로 대표되는, 급속히 발전하는 경제기적속에서 이 고무적인 여성은 수세기동안 일관되게 내려온 전통의 무게에 맞서 싸우던 사람들을 대변해 왔습니다. 그녀의 다른 사회운동에서처럼 여기에서도 이태영씨는 진실로 우리의 존경과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나는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부부가 일년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이태영씨가 그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미 국무장관 조지 슐츠의 부인이 한국을 방문해 이 변호사의 가정법률상담소를 두번 찾았다는 것도 확인할수 있었다. 내 아내도 순종하는 하인과 같은 유교적 여성관념과 관련된 불평등을 극복하는 것을 도와주는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런 전통은 여성들에게 그들의 능력을 증명할 기회를 주는 것을 꺼려했다.
지금까지 나의 회고록은 거의 예외없이 남성 지도자들에 대한 기억에 집중돼왔다. 한국정부와 주요 기업에서 내가 상대해야 했던 사람들은 남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든 활동분야에서 놀랄만큼 뛰어난 여성 지도자들과 내가 접촉할 기회는 많이 있었다. 예를 들어 나는 다양한 한국여성 공연예술가들의 훌륭한 재능에 특히 관심이 있었다. 60년대 나는 패티 김을 소개받았는데, 그때 그녀는 막 음악인생을 시작해 당시 남대문옆에 있던 「그랜드 호텔」의 나이트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그녀의 가수인생을 지켜봤다. 대사로 있는 동안 우리는 자주 그녀와 자리를 함께 했다. 패티 김은 대중적 음악에다 열정과 고상함까지 갖췄다.
아내와 내가 오페라의 열렬한 애호가가 된 이후 우리는 기회있을 때마다 오페라 공연을 보기 위해 세종문화회관을 찾았다. 그곳은 정말 황홀한 콘서트 홀이어서 음향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잘 어울렸다. 82년 한국 최고의 소프라노인 김영미(金英美)씨를 소개받아 알게 된 것은 그곳에서였다. 그녀는 2년전 파바로티 상을 받았다. 그녀는 대규모 미국 대표단의 방문이 있을 때 대사관저에서 노래를 불러주기로 했다. 아내는 이 일을 주선했다. 그러나 나한테 좋았던 것은 재능있는 멋진 음악가를 가까이에서 즐길수 있었다는 것 뿐 아니라 미국을 대표하는 한사람으로서 나의 위상을 높일수 있었다는데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을 위해 공연할 훌륭한 음악가를 데려올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두는 김영미씨가 자신의 경험에 대해 들려주는 얘기를 즐겼다. 그녀가 좋아하는 이야기중 하나는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함께 푸치니 오페라를 불렀을 때에 대한 것이었다. 뚱뚱한 체구때문에 구설수에 오르곤 했던 그 테너를 포옹하려고 할때 자신이 얼마나 작고 팔은 또 얼마나 짧은지 그녀는 몸짓을 써가며 설명했다. 그녀의 설명을 듣고는 대사관의 모든 한국인과 미국인은 폭소를 터뜨렸다.
제조업계에는 많은 여성지도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존경스런 마음으로 그들이 이룩한 업적을 지켜봤다. 채몽인(蔡夢印·70년 작고)씨가 타계했을 때, 그는 이미 성장일로에 있는 화학기업을 세웠다. 미망인 장영신(張英信)씨는 계속 사업을 수행했고, 애경그룹으로 발전시켰다. 이 그룹은 10개이상의 계열사를 지닌 회사로 성장했다. 그녀는 독학으로 화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외에도 애경백화점을 설립했고, 중부컨트리 클럽을 만들었다. 세니와 나는 거기서 우리의 솜씨를 시험했다.
또 하나의 훌륭한 여성 기업가를 언급하지 않을수 없다. 그녀는 워커집안과도 매우 가깝고, 또 소중한 친구였는데, 오리엔탈 공업 사장 남궁욱강(南宮郁江)씨이다. 그녀는 직접 플라스틱과 기타 품목 제조업체의 선두업체로 회사를 탈바꿈시켰다. 남성들이 지휘하는 다른 회사와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그녀가 당시 건축이 진행중이었던 올림픽 스타디움의 의자 공급권을 따냈을 때, 우리는 모두 환호했다.
정치를 포함한 한국의 현대사회에서 여성이 점점 적극적이고 동등한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는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그 상당부분은 현대화가 진행중인 다른 사회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들이었다. 첫째, 많은 여성들이 일터로 옮겨가면서 육아(育兒)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왔다. 93년까지 한국인력의 40% 이상은 여성이었다. 이것은 가정과 가족생활의 불협화음을 의미했다. 둘째, 여성을 대변하는 활동이 많은 나이든 보수 유교주의자들 입장에서는 외국의 침투와 서구사상의 결과로 간주되는것을 나는 지켜봐왔다. 미국은 지난 반세기동안 다른 어떤나라보다 한국의 사회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쳐왔다. 내 임기가 거의 끝나갈때, 여성운동에 대한 이같은 관심이 반미(反美)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민주적 조직체를 만들고, 양국간 균형관계를 위한 주요한 토대로서 여성문제를 다룬다는 확고한 입장을 우리가 계속 견지해 나가야 한다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우리는 97년 5월 사우스 캐롤라이나 대학에서 열린 「가속화하는 한국의 변화」라는 주제의 회의에서 「한국사회에서 변화하는 여성의 역할」을 주요 안건으로 채택했다. 워싱턴에 있는 「환태평양 컨설팅」(Pacific Rim Consulting)의 캐티 오(Katy Oh) 박사는 「직장과 정치에서의 여성」이라는 주제의 논문을 제출했는데, 이는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것중 가장 열띤 학술토론을 불러일으켰다. 95년 12월 서울에서는 여성 정치지도자들의 역할에 대한 아시아·태평양 회의가 열렸다. 반면 한국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관련된 많은 토론주제들은 너무 복잡해서 부계(父系)사회로서 가정에서 여성에게 동등치 못한 요구를 하는 유교사회에서는 이를 해결할수 없었다. 캐티 오 박사는 논문에서 이렇게 결론지었다. 『한 여성이 전통적인 집안에 시집가면, 그녀는 일생동안 충성심을 요구하는 사회공동체의 한 일원이 된다. 그녀는 바깥에서는 의사이지만, 집에서는 여전히 시댁의 하인이 된다』 그러나 오랜 전통을 훼손하는 것은 한국의 중요한 사회조직인 가정을 공격하는 것으로 간주될수 있다.
김대중씨는 오박사가 언급한 것처럼, 『여성인권의 가장 유망한 정치후원자』였다. 대통령 취임식후 그는 여성지도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주요 외교직책중 하나인 주 러시아 대사와 각료, 부(副)각료직에 여성을 임명한 것은 한국의 여성 단체들을 기쁘게 했다.
처음의 주제로 돌아와서 우리는 여성지위와 관련한 한국사회의 중요한 변화를 목격하고 있다. 한국내 많은 미국친구들은 그 변화가 한국민의 업적들가족간 유대, 규율과 예의, 이성(異性)간의 존중―에 튼튼한 기반을 제공했던 중요한 특징을 크게 훼손하지 않기를 바랐다. 미국은 가족전통의 심장부에 자리잡고 있는 양심적이면서 헌신적인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그것이 「어머니」로 대표되는 한국의 여성에 의해 고무된 것임은 물론이다.<워커 전 주한 미 대사 번역="황유석" 기자>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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