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저가 위기 속의 아시아경제를 또 한차례 뒤흔들 태세다. 엔저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이후 어느 정도 가닥을 잡은 국내 경제의 구조조정 노력에도 엄청난 외부적 장애물로 등장하고 있다. 국내 경제의 경쟁력이 바닥난 탓에 수출을 비롯한 실물경제와 금융시장이 엔저 파괴력을 버텨낼 저항력을 제대로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엔저의 국내 파장과 미국·일본의 입장을 정리한다.◎국내금융시장/수출 경쟁력 ‘비상’/달러물량 워낙 많아 원화환율 이례적 안정 자본유입에 장애 작용
「한국의 외환시장은 아시아 각국과 거꾸로 간다?」
일본엔화의 대폭락으로 태국 싱가포르 말레이지아 인도네시아등 동남아 통화가치가 급등락을 반복하는데도 국내 금융시장은 이례적으로 안정을 보이고 있다. 주가만 큰 폭으로 떨어졌을 뿐 환율은 달러당 1,400원대에서 상승이 강하게 저지되고 있고 콜금리는 되레 연 15%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원화환율이 아시아통화와 「따로 노는」 것은 시장 달러물량이 워낙 풍부하기 때문. H은행 외환딜러는 『기업들이 거주자외화예금이나 종금사 스와프를 통해 비축한 잉여외화가 130억달러에 달하고 있어 엔저에 따른 환율상승심리를 강하게 억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한국금융시장의 「독자행보」엔 엄연한 한계가 있고 또 그것 자체가 제2의 외환위기에 시한폭탄으로 작용할수 있다는 점이다.
금융연구원은 『원화환율도 실제론 강한 절하압력을 받고 있다』며 『엔화환율이 지금처럼 달러당 140엔대를 유지할 경우 원화환율도 최소한 달러당 1,450∼1,550원은 되어야한다』고 말했다.
주변국과 보조를 맞춰 당연히 올라가야할 환율이 묶여있게 됨에 따라 자본유입 장애요인으로 작용, 지난해 외환위기 때처럼 달러가 한꺼번에 빠져나가 일순간 걷잡을수 없이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즉 지금의 외환시장은 매우 「위험한 안정상태」란 얘기다. 수출둔화→외자유입감소→외국인투자이탈→외환위기재연의 악순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이성철 기자>이성철>
◎실물경제 영향/1500㏄급 자동차 수출경쟁력 곤두박질 전자·철강도 큰타격
엔저로 우리나라 수출은 심각한 타격을 받을 전망이다. 수출업계는 그동안 국내업체간 과당경쟁에다 동남아시장의 위축으로 채산성이 떨어진 상태에서 엔저파고가 덮쳐 수출단가까지 떨어질 경우 수익성은 더욱 악화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일본상품과 경쟁관계에 있는 자동차 전자 철강등 수출주력품목의 타격이 가장 심각할 것으로 보인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엔화약세에 힘입어 일본업체의 가격경쟁력이 커질 경우 국산과 10%정도 가격차가 났던 1,500㏄급 자동차의 수출이 가장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1∼3월 월드컵특수로 호조를 누리다 5월부터 내림세로 돌아선 가전수출의 경우도 엔화폭락이 지속될 경우 일본이 가전제품 가격인하에 나설 것으로 보여 TV등 주요상품수출은 도전에 직면할 것으로 예상되고있다.
철강업계도 국제시세하락에다 동남아 경제위축등으로 수요가 격감해 수출단가가 냉연제품의 경우 전년동기대비 톤당 60달러이상 떨어진 상태라며 엔저이후 바이어들의 단가인하요구가 심해지면서 원가보다 밑지고 파는 출혈수출직전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무역협회의 한 관계자는 『엔화가 달러당 150엔선까지 떨어질 경우 자동차 가전 타이어등 수출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품질 혁신과 생산성 향상등을 통해 근본적인 가격경쟁력을 제고하는 방안을 준비해야한다』고 밝혔다.<이재열 기자>이재열>
◎日의 시각/日 “관망” 美 “不개입”/“150까진 걸림돌없어” 저지선 설정 의욕잃은듯 방어보다 경기부양 관심
도쿄(東京) 외환시장에서는 한때 「달러당 135엔」, 이어 「달러당 140엔」이 엔화 방어의 「마지노선」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 마지노선이 무너진 이후 잠시 「달러당 145엔」이 「저지선」으로 거론되더니 이제는 뚜렷한 저지선조차 설정할 의욕을 잃은 분위기다. 그저 현재의 엔저를 주도하는 「미국의 뜻」으로 보아 로버트 루빈 미재무장관이 언급한 달러당 150엔선까지는 특별한 걸림돌이 없다는 관측이 무성할 뿐이다.
이같은 시장의 분위기는 무엇보다 정책 당국의 불분명한 태도 때문이다. 엔화가 달러당 144.75엔까지 떨어진 12일 오전에도 일본 정책담당자들은 아직은 특별히 문제될 것이 없어 당분간 지켜보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오미 고지(尾身幸次) 일본 경제기획청 장관은 『엔저가 일본 경제에 마이너스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며 『세계경제에 미칠 영향이 문제이지만 아시아, 구미의 세계경제 지도자들이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쓰나가 히카루(松永光) 대장성 장관도 『지나친 엔저는 여러 가지 마이너스 영향이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강한 우려를 가지고 지켜보겠다』며 『지나친 경우에는 단호한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다』는 정도에서 그쳤다.
민간도 마찬가지다. 시장 개입에 의한 단기적인 엔화방어보다는 장기적인 경기부양에 치중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시장개입이 실패할 경우 오히려 엔화의 추락을 촉진할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공공투자와 감세 등의 정책이 별 효과를 드러내지 못하자 『일시적인 엔저를 부르더라도 통화공급을 늘리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주장까지 힘을 얻어가고 있다.<도쿄=황영식 특파원>도쿄=황영식>
◎美의 시각/일본시장 불신탓 150선에서 파장 재점검 비관론자 “180까지”
미 뉴욕외환시장의 딜러들은 지속되는 엔화 약세에 대해 『시장이 엔화를 계속 시험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시장이 미 일 등 국제사회가 엔화 공동방어에 나설 시점을 가늠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점에서 11일 로버트 루빈 미 재무장관의 발언은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 격이다. 그는 이날 상원 금융위원회에 출석, 『엔화 하락 여부는 일본 내부 상황에 달렸다』고 말했다. 즉 미국이 엔화지지를 위한 시장개입에 협력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시장의 반응은 즉각 나타났다. 엔화 투매로 달러당 엔화가 한때 달러당 144.35엔까지 치솟았다. 또한 딜러들은 엔화 적정선에 대한 전망도 이날 수정했다. 지난달말 루빈장관의 「150엔선」발언 당시 160엔선을 바라보던 비관론자들은 엔화가 180엔선까지도 추락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같은 분석은 일본시장에 대한 불신에 근거하는 것이다. 일 경제 개혁이 단기간내 진행될 가망이 안보이는데다 경제회복에 필수적인 금융 기관의 부실로 「엔화 팔자세」가 가속할 것으로 전망했다. 반면 일본 불신은 미국 신뢰로 이어져 미 국채인 재무부채권(TB) 등은 연일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딜러들은 현 엔화의 추락세로 봐 150엔선은 시간 문제로 보고 있다. 이 선은 일단 미국의 저항선으로 여겨지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중국 위안(元)화의 평가절하 여부가 큰 변수이다. 하지만 이상이 없을 시 엔화를 160엔∼180엔까지 방치할 수도 있다는 것이 미 외환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전망이다.<뉴욕=윤석민 특파원>뉴욕=윤석민>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