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느 초상집엘 가나 인사만 하고 돌아나오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다. 그런데 며칠전 한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서 어느 대학병원에 마련된 빈소를 찾아갔을 때에는 나의 심경이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사진에 담긴 그 어머님의 곱게 늙으신 모습을 바라보면서 정말 그 자리를 떠나고 싶지가 않아 오래오래 거기 앉아서 흘러간 옛일들을 되새겨보았다.만일 빈소에 사람들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평생에 처음 그 초상집에서 밤을 새웠으리라고 믿는다. 내가 거기 앉아 마음속으로 얼마나 울고 있었는지 문상객은 어느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꼭 52년전 6월 어느날, 그 어머님은 딸 하나를 데리고, 나의 어머님은 아들 하나를 거느리고, 달빛도 없는 어두운 밤에 논두렁 길을 따라 남쪽으로 남쪽으로, 철원을 거쳐 연천을 지나 38선을 함께 넘어 서울까지 왔다. 그날 밤의 일이 지금도 내눈에 선하다. 그 따님은 열일곱, 나는 열아홉, 청운의 꿈을 안고 단행한 일생일대의 모험이었다.
우리는 38선에서 처음 만난 것이 아니고 평양에 살던 때에도 잘 아는 사이였다. 아마도 같은 교회에 다녔기 때문인 것 같다. 나의 어머님에게는 아들 외에 딸들도 있었지만 며칠전 아흔네살에 세상을 떠나신 이 어머님에게는 외동딸이 하나 있었을 뿐, 매우 외로운 삶이셨다. 그래서 우리는 월남하여 한동안 한지붕 밑에 생활한 일도 있었고 신촌에 이사온 뒤에는 한집에서 오래 같이 산 적도 있었다. 73년에 세상 떠나신 나의 어머님은 영성 권사님보다 한 살이 위여서 권사님은 나의 어머님을 늘 「헝님」(형님)이라고 부르셨다.
권사님은 그 따님을 기도와 간구로 훌륭하게 키우셨다. 확실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키워 공부도 잘 시키고 시집도 잘 보내 잘생긴 손자도 있고 손녀들도 있다. 나의 어머님의 이 아들은 장가도 한번 못갔으니 나의 어머님에게는 나로 인하여 생긴 손자도 손녀도 있을 리 없다. 그런데 그 아들도 이제는 칠순의 노인이 되었구나.
6월의 맑은 하늘가에 흐르는 저 흰구름 조각에 나의 순결한 첫사랑이 스며 있으련만! 권사님 가신 것이 그래서 더욱 서럽게 느껴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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