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저녁을 먹고 나면 그는 누워 리모콘을 쥔다. MBC와 KBS 2TV의 스포츠뉴스를 보고는 케이블TV의 스포츠 채널로 옮긴다. 방심한 틈에 아내가 리모콘을 쥐면 『맨날 보는 드라마 지겹지도 않냐』고 면박을 주고는 다시 리모콘순례를 떠난다. 축구나 농구면 좋고 골프라도 상관없다. 실내골프장 한 번 가보지 않았지만 박세리의 요즘 퍼팅이 전과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 만큼 지식이 해박하다. 해외경기가 있으면 새벽에 일어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골이 들어갈 때의 그 희열, 아내는 모른다.이것은 한 남자의 이야기지만 많은 남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월드컵이 시작되면서 또 온나라가 법석이다. 「구국」이나 「경제 살리기」에 따라붙던 「기원」이라는 말이 16강과 만나 가장 화려한 갈망이 됐다. 「16강마케팅」도 난리다. 한국이 16강에만 들면 텔레비전이나 핸드폰을 하나 더 준다니 16강에 들어 손해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한국남성의 상당수가 프로 해설가급으로 스포츠지식이 늘어가면서 뱃살 역시 프로레슬러급으로 불어가고 있다. 물론 사정이 나쁘다. 지방자치단체가 주민들을 위해 체육시설을 늘리고는 있지만 대다수 직장인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오후 6∼7시, 늦으면 9시까지 부분적으로 문을 여는 체육관에 저녁도 거른채 뛰어갈 직장인은 많지 않다. 옆집 사는 사람 얼굴도 모르는데 조기축구가 웬 말이며, 시국이 어수선한데 안 잘리고 직장이나 잘 다니면 다행 아니냐는 게 중론이다.
하지만 자본과 몸은 사정을 헤아려 주지 않는다. 뼈 빠지게 일하고 나면 『몸도 불편하신데 집에 가서 쉬라』는 게 요즘 분위기다. 자본은 평가할 뿐 헤아리지 않는다. 최근 싱가포르 타임스지는 AFP를 인용, 『20∼34세의 영국남자중 95%는 월드컵 시청과 이상형 여성과의 섹스중 월드컵을 택했다』고 보도했다. 한국남성을 조사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재(財)테크 시(時)테크도 좋지만 이제「몸(體)테크」를 해야 할 때다. 어려운 시대에는 갖춰야 할 덕목도 많아지는 법. 그래서 IMF가 무서운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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