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금 0원 한우물 판다/은행원·총리 행조실장 등 경력박승복(朴承復·76) 샘표식품공업 회장은 은행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정부 고위공무원으로 일하다 기업가의 길을 걸어온 다채로운 경력의 소유자다.
박회장은 76년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차관급)을 끝으로 공직생활을 마감한 후 샘표식품 대표이사를 맡아 22년동안 기업을 이끌어오면서 3가지 원칙을 세워 지켜왔다. 「한푼의 비자금도 만들지 않는다. 한우물 경영으로 세계적인 식품전문기업으로 도약한다. 근로자들과 동고동락한다」
46년 설립된 52년 역사의 샘표식품은 간장 고추장등 각종 장류를 만들어 현재 종업원 200명에 연간 1,000억원의 매출액을 올리고 있는 중견기업.
정부 고위직을 지낸 사람이라면 은행돈을 끌어다 사업을 확장하기가 십상이건만 그가 정반대의 길을 걸어온데는 숨겨진 사연들이 있다.
함남 함흥출신으로 해방전 한국식산은행에 몸담았던 그는 산업은행 업무과장으로 있던 59년3월 재무부 총무과장으로 발탁된다. 66년 재무부 기획관리실장(1급) 시절 국제통화기금(IMF)로부터 1차 차입금 1,000만달러를 들여오기도 했다. 73년 당시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는 행정조정실을 창설하고 그를 초대 행정조정실장으로 임명했다. JP와 호흡을 맞추며 갖가지 정부 업무를 기획하고 조정하면서 용인 민속촌 건립 등을 주도하기도 했다.
76년 JP와 함께 총리실을 떠난 그는 그해 8월 박규회(朴奎會) 샘표식품 창업주의 별세로 회사경영을 맡게 됐다.
『선친께서 3년동안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한 터라 회사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서울 창동공장에서 근로자들과 함께 밥을 먹으며 회사를 추스렸다. 정부기관을 방문할 일이 있으면 내 자신을 낮추고 먼저 주사나 사무관을 찾아 사정을 설명했다』 박회장은 고된 공직생활에 비하면 회사경영은 오히려 쉬웠다고 회상한다.
그럭저럭 회사가 자리를 잡아갈 즈음 전두환(全斗煥) 정권이 들어섰다. 박회장은 「JP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보안사 동빙고 분실로 불려가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이 때부터 박회장은 10여년동안 24시간 감시대상이 되었다.
『생존 방법은 간단했다. 아무리 세무조사를 벌여도 겁날 것 없는 투명경영이었다』 박회장은 간장 고추장 등 장류품목이 크게 성장하지 않는 좁은 시장이지만 이 분야에서 세계1등 전문기업이 되어보자는 목표를 정했다.
경기 이천시에 간장제조 단일공장으로는 세계최대규모의 공장을 짓고 식품연구와 함께 최신식 설비를 지속적으로 들여놓았다. 90년 일본장유연구소는 샘표식품의 간장이 맛과 품질에서 세계 1등이라는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현재 샘표식품의 간장 생산능력은 세계 3위. 국내시장의 50%이상을 점유하면서 미국 유럽 동남아 러시아등 세계 곳곳에 수출하고 있다. 미국 아이오와주는 샘표식품의 공장부지까지 닦아놓고 몇년째 박회장에게 공장을 지어달라고 매달리고 있다.
현재 상장회사협의회장, 중견기업연합회 부회장, 이북5도 행정자문위원, 대한적십자 서울지사장등 수많은 공식직책을 맡고 있는 박회장은 『우리경제가 살아나려면 전문성을 갖춘 중견기업의 역할이 강조되어야 한다』면서 자신의 기억들을 기록으로 남기기위해 회고록을 준비중이라고 말했다.<최원룡 기자>최원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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