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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和平·許三守와 뜻밖 ‘기생파티’(한국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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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和平·許三守와 뜻밖 ‘기생파티’(한국의 추억)

입력
1998.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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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수근씨가 추석전날 한식집 초대후 소개/청와대 ‘이너서클’ 파악 나름대로 중요한 기회/“두 許씨 녹초” 소문 삽시간 번져 ‘어항속 삶’ 실감81년 7월말 나는 대사로 봉직하기 위해 서울에 도착했다. 몇주간의 정착기간이 지난 8월12일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했다. 그때부터 나는 정식으로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을 대신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약 한 달 뒤 나는 건축가 김수근(金壽根·86년 작고)씨로부터 저녁초대를 받았다. 만찬은 서울도심 인사동에 있는 「동원」이라는 한정식집에서 열렸다. 인사동은 미술품, 서예작품 등으로 한국의 전통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오래되고 유명한 식당인 동원은 여러 세대동안 내려왔다. 그것은 전통적인 「기생집」이었다. 만찬은 추석 전날인 9월11일로 잡혀 있었다.

내 몇몇 참모진은 이 만찬이 합당한 것인지, 그리고 미 대사가 신임장을 제정하자마자 기생집에 가야 하는 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다. 그러나 나는 김씨와 매우 오랫동안 친분을 쌓아 왔다. 그는 건축가들의 모임인 「스페이스 그룹」(Space Group)을 만들었고 매우 흥미로운 작업장을 갖고 있었다. 거기서 그는 한국건축에 대해 설명했고 또 슬라이드를 보여줬다. 그 화랑은 검은색으로 장식돼 있었는데 방문객들은 커다란 강당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둠과 공간관계의 조화를 경험할 수 있는 아주 매혹적인 곳이었다. 김씨는 확실히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의 제자들 모두 그를 존경했다. 공간은 가로 세로 20×30평방피트(55.7㎡)정도였는데 모든 사람은 훨씬 더 큰 것처럼 느꼈다.

김수근씨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났다. 그는 서울의 호텔 신라에서 멀지않은 타워호텔 옆에 아직도 서있는 「자유센터」(Freedom Center)의 디자인공모에서 다른 경쟁 건축가를 제치고 이를 따냈다. 나는 김수근씨를 잘 알고 있었으며 그는 결코 부적절한 목적을 위해 나를 초대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내 참모진에게 확신시켰다. 그래서 나는 그날 저녁 7시30분 음식점의 현관에서 그와 만났다.

김씨는 내가 그 자리에 함께 한 데 대해 정말 기쁘다고 말했다. 그는 몇몇 친구를 나에게 소개시키고자 했다. 그는 허화평(許和平) 허삼수(許三守)씨를 소개했다. 그들은 모두 전대통령을 청와대에까지 이끈 쿠데타에서 그를 도운 육군대령들이었다. 그들은 풍채가 좋았고 분명했으며, 흥미로운 사람들이었다. 허화평씨는 김대중씨의 사형형량을 감형하는 대신 전대통령이 레이건 대통령의 첫 국빈방문객이 되도록 하는 일을 맡았던 내 친구 리처드 앨런씨와 같이 일을 했다. 당시 이같은 거래는 한반도에서의 더 이상의 폭력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다. 허화평씨는 후에 스탠퍼드 대학에 갔고 워싱턴에 있는 헤리티지 재단의 객원연구원이 됐다. 허삼수씨는 인상이 좋고 말이 많지 않은 사람이었다. 사려깊고 조심성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청와대의 세번째 측근인사는 몇 년 후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허문도(許文道)씨였다. 대사관의 미국 참모진과 「Foreign Service Nationals」(FSNs;외국공관에 근무하는 한국요원)들은 전대통령의 「이너서클」에서 권력을 장악한 이 세 사람이 모두 같은 「허」씨라는 사실에 재미있어 했다. 당시 그들은 그 이름이 나올 때마다 『허, 허, 허』하면서 흉내내고 웃기도 했다. 세 허씨에 대한 소문과 평판을 생각하면 확실히 그 모임은 흥미로운 자리였고 나는 중요한 이 세 인물에 대해 나름대로 평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청와대와 중요한 상호관계를 맺어야 하는 신임 대사에게 상대적으로 좋은 기회가 된 것은 분명했다.

미국사람들은 종종 기생파티의 풍습에 대해 오해한다. 전통적인 시대에는 여성에게 많은 교육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집안에 있어야 했다고 한국 친구들은 우리들에게 확인시켜 줬다. 아름다운 여성들은 기생으로 뽑혀 시와 문학에대한 특별교육을 받았다. 그들은 접대하는 방법, 농담과 익살을 나누는 법에 대해 알고 있었고 한국 예술세계에 대해 많이 친숙해 있었으며 사회의 여러 소문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었다.

과거 이 여성들은 16세의 어린 나이에 시작했으나 30세가 되면 결혼하거나 혹은 떠나야 했다. 왜냐하면 한국남성들은 젊은 여자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후대에까지 보호자들이 매우 엄격하게 그들을 동반하고 다녔다. 그 여성들의 임무는 음식점에서 남자손님옆에 앉아 시중들면서 전통주나 다른 술이 충분히 갖춰져 있는 지 그래서 손님이 가장 좋은 한국음식을 잘 먹고 있는 지 책임지는 일을 했다. 또 함께 춤추고 노래하기도 했다. 기생집에서 모든 사람은 노래를 불러야 하는 것으로 돼있다. 우리는 금방 한국사람들은 외국인이 노래하는 것을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81년에 이르러 많은 기생파티에서 한국의 전통주는 매우 값비싼 스카치 위스키로 대체됐다. 위스키는 손에 넣기가 매우 어려웠던, 그래서 영향력과 권력의 상징이었다. 물론 건축가로서 대성한 김수근씨는 우리가 축배를 들 때 기생들에게 위스키를 잔에 가득 따르도록 했다.

운좋게도 나는 과거에 기생집을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 밤 나를 시중들도록 돼 있던 매우 젊고 매력적인 여자를 설득해 가능하다면 항상 내 조그만 잔에 위스키 대신 차를 따르도록 했다. 축배가 자주 돌아갈 수록 이는 아주 현명한 결정이었다. 매우 훌륭한 한국 전통 음식과 유쾌한 대화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 나는 나혼자 힘으로 떠날 수 있었다는 것을 단언할 수 있다. 대조적으로 허화평씨와 허삼수씨는 아마도 불같은 술을 엄청나게 마셨을 터였다.

이 일화는 내가 들어왔고 내 대사관 참모진이 내게 경고했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경우가 됐다. 그들은 나에게 미 대사에게는 사생활이 없다는 것을 환기시켜 줬다. 내 전임자 중 한사람인 윌리엄 포터 대사는 자주 이에 대해 불만을 말했다. 가끔 빌(윌리엄의 애칭)은 막 어디론가 떠나기를 원했다. 그는 조그마한 컨버터블차를 몰고 서울 교외로 나가 전통스타일의 여관에서 묵곤 했다. 문제는 그가 가는 곳을 다른 사람에게 말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한국보안요원들에게 그것은 매우 당혹스런 일이었다. 나는 미리 내가 언제, 어디로 여행할 것인가에 대해 그들이 알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들은 미 대사가 혼자 차를 몰고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다행히 빌 포터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대사관의 보안을 책임지고 있는 한국인의 이같은 희망을 존중했다.

내 참모진은 내가 도착했을 때 나에게는 아무런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과, 미 대사와 서울의 전도양양한 많은 미국인들은 유리 어항에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줬다. 사람들은 지켜보고 있었으며 나는 전혀 비밀을 가질 수 없었다. 후에 때때로 나는 존경하는 나의 아내 세니와 내가 정말로 그들에게 농담거리를 많이 제공해 주지 못해 한국사람들이 입방아에 올릴 많은 사건을 접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동원에서의 만찬이 있은 지 3일 뒤인 9월14일 나는 노신영(盧信永) 외무장관을 만났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딕시, 축하합니다. 나는 당신이 금요일밤 청와대의 두 실세를 「녹초」로 만들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것은 미 대사 사회생활의 일거수일투족이 서울 장안에 얼마나 빨리 퍼지는가를 보여준 좋은 사례였다. 여러면에서 서울은 지도급 인사들에 대한 소문으로 꽉찬 조그만 마을이었다. 내가 있는 동안은 항상 마음 속에 새기고 있었야 할 것이었다. 그것은 유리 어항, 정말 황금 유리 어항 속의 삶이었다.

후에 전두환 정권에 대한 학생들의 반대 시위가 더욱 잦아지면서 한국에서의 고위급 미국 대표에 대한 안보에의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마이크 맨스필드 일본주재 미 대사가 일본 보안간부에게 관용차에 「무장경호」를 취하도록 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한국군 보안간부는 한국의 미 대사도 차에 동석하는 보안요원을 대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 아내와 나에게는 정말 예의바르고 헌신적인 한국의 박병장이 배속됐다. 30년 이상 미 대사관에서 일해온 우리 운전자는 박병장이 차안에서 나누는 대화는 무엇이든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줬다. 나는 그에게 민감한 문제는 절대로 얘기하지 말자고 주지시켰다. 박병장(후에 중위로 진급함)이 1년 이상 우리와 함께 한 후 운전자 김씨는 우리가 박중위에 대해 더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나는 『우리는 정말로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족얘기를 했고, 김씨 당신도 알다시피 그것은 정다운 것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특히 한국에서 우리가 근무하는 동안 느꼈던 가치있는 행복을 가져다 주었다.

동원에서의 그 유쾌했던 저녁시간은 내 마음속에 맴돌았다. 왜냐하면 임기초기 나는 한국의 다양한 사람들, 그룹, 정파들이 미 대사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를 내릴 기회를 찾고 있으며 미 대사 또한 그들 혹은 그들의 스타일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전정권에 의해 꽤 엄격한 통제가 이뤄지고 있는 사회에서 다양한 정파의 지도자들은 미 대사와 교제하려고 하곤 했다. 동맹국 미국의 지도급 주재국 대표자가 다양한 현안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경청하도록 하려는 희망에서였다. 나는 어떠한 부주의한 언급도 하지 않도록, 혹은 그 사회에 전달될 지도 모를 의견을 표출하지 않도록 극도의 조심을 해야만 했다. 반면 정치분야의 지도자들을 평가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무역 방위 학술교류 심지어 대사관이 해결할 수 없었던 비자문제와 같은 주요 현안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알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필요한 것이었다.

운좋게도 미 대사관은 한국에서 대사의 임기 이상 근무한 많은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지침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가장 좋은 지침은 대부분이 20년 이상 대사관에서 근무했던 한국사람들인 FSNs에서 나왔다. 나는 이들이 얼마나 가치있는 사람들이고, 또 그들의 입장때문에 생기는 몇가지 문제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가 하는 것들을 금방 이해하게 됐다. 그들은 한국 시민들이었고, 자신들의 모국에 충성심을 보여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한편으로 자신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요구하는 외국법인체에 근무하고 있었다. 전 세계 외교가에서 FSNs는 비슷한 문제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그것이 사소하든 심각하든, 양국 문화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몇몇 현안을 해결할 때, 가장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내 임기동안 이같은 민감하고 현명한 사람들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 때문에 안고 있던 모순을 극복하면서, 항상 변화하는 양국관계의 균형이 유지되도록 노력했다. 예를 들어 나는 박인훈씨의 현명함과 그가 지역사회에 갖고 있던 대화통로에 대해 깊이 감사하고 있다. 그는 우리 대사관 정치분과의 선임 FSN이었다. 그는 다뤄져야 할 민감한 문제가 있을 때에는 가끔 내 통역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조치를 취해야 할 문화간 오해가 생길 경우 조언을 얻기 위해 그를 자주 찾았다.

때때로 FSNs는 특별한 상황에서 미국에 대한 시각이 지극히 나빠졌을 때, 동료 한국인들의 비난의 표적이 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국제관계와 문제 해결을 위한 필요한 감도(感度)를 순화하는데 그들이 얼마나 필수적인 존재인가를 진실로 깨닫게 됐다. 모든 미국 참모진은 그들의 존재와 헌신적인 노력에 깊은 경의를 표했다.<번역=황유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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