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오늘(31일)로 개원 50주년을 맞았다. 이 땅에 서구식 의회민주주의가 도입된지 정확하게 반세기가 흘렀다. 결코 짧지 않은 이 기간동안 국회는 우리 현대사의 중심권에서 국민과 영욕을 함께 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반세기 우리 헌정사는 영(榮)보다는 욕(辱)이 지배해 온 「누더기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45년 8월 패전처리 일환으로 「해방」은 됐지만 좌우익간의 이념대립때문에 영일(寧日)이 없었다. 유엔결의에 따라 48년 5월10일 남한지역에 한해 실시된 총선거를 통해 배출된 선량(選良)들이 50년전 바로 오늘 국회의 문을 열었다. 개원국회는 국법의 으뜸법인 헌법을 제정하고 초대 대통령도 선출해 신생 대한민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비록 우리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서구식 의회민주주의였지만 제도로써 뿌리를 내려가고 있을 무렵 6·25동란이 일어났고, 헌정사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쟁의 혼란속에서 리더십의 착근을 이유로 각종 변칙적인 조치들이 없지 않았지만 헌정만큼은 중단되지 않았다.
개발독재시대와 함께 시작된 국회수난사는 얼룩진 헌정사의 단면으로 각인되고 있다. 5·16으로 시작된 개발독재가 때로는 국회를 무력화시켰고, 때문에 헌정사는 질곡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국회가 통치권자의 의도에 따라 「통법부」로 추락했는가 하면 「권력의 시녀」로 매도당할 수밖에 없는 불운을 겪어야만 했다. 특히 탱크를 앞세워 국회문을 강제로 닫았던 10월유신과 5·17정변은 의회민주주의의 혹독한 시련기였다고 할 수 있다.
87년 6·10항쟁으로 정치는 다시 복원됐다. 하지만 국회가 「민의의 전당」으로서의 기능을 회복하는데는 실패했다. 이유는 당리당략 때문이다. 6공과 문민정부에서도 의회주의의 괄목할 만한 발전은 이뤄지지 못했다. 오랜 군사통치의 잔재 처리가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헌정사 반세기만에 이룩한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국회는 여전히 국민의 신뢰권밖에 머물고 있다. 정치의 고비용구조와 함께 오히려 혁파의 대상이 되고 있다. 6·25에 이어 최대의 국난이라는 국제통화기금(IMF)체제속에서도 소모적인 정쟁이 계속되고 있다. 툭하면 일방국회요, 열렸다 하면 파행운영이다. 이처럼 법을 만드는 곳에서 법을 안지킨다. 입법따로 준법따로다. 15대 후반기 의장단구성이 이미 법정시한을 넘겨 지금은 사실상 「국회부재」상태다. 오늘 「반백(半百)」의 연륜을 가지면서 다짐해야 할 사항이 있다면 그것은 국회가 결코 진화(進化)의 걸림돌이 돼서는 안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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