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회 ‘제재’ 채찍 끝내 무위로/탑재미사일 보유… 核강국 반열에파키스탄도 결국 핵실험을 강행했다. 11일과 13일 연이은 인도의 핵실험에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던 파키스탄은 28일 최초로 핵실험에 성공함으로써 핵강대국의 반열에 들어섰다.
국제사회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경쟁으로 촉발된 서남아시아의 긴장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5대 핵강국이 주도해 온 세계의 핵질서도 무너지게 됐다.
미국과 일본 등 국제사회는 그동안 파키스탄에 대해 핵실험을 실시하면 경제제재조치를 단행하겠다는 채찍과 함께 실험을 하지 않는 대가로 대규모 경제지원을 하겠다는 당근작전을 병행했으나 결국 무위로 돌아갔다.
파키스탄이 핵실험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국민과 야당들의 압력이 워낙 거센데다 국가 안보차원에서 적대국인 인도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나와즈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는 더 이상 핵실험을 미룰 경우 자신의 정치적 입지마저 위기에 빠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핵에 대한 파키스탄의 집념은 74년 인도의 핵실험 실시에서 비롯됐다. 71년 파키스탄과 인도가 분리된 이후 정권을 잡은 줄피카르 알리 부토 당시 대통령은 인도의 핵실험소식에 『초근목피로 연명하더라도 반드시 핵무기를 만들겠다』고 의지를 천명했다.
파키스탄은 당시 이슬라마바드 인근 카프타에 5㎿급 실험용 원자로와 카라치에 137㎿급 캐나다형 원전을 국제감시하에 운용하고 있었다.
77년 군사쿠데타로 부토 정권을 넘어뜨린 군부 독재자 모하마드 지아 울하크는 리비아와 회교권 우방들의 자금 지원 아래 핵무기 제조 노력을 계속했으며 86년 원자폭탄용 우라늄 농축에 성공했다. 미국은 당시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반소련세력 지원에 파키스탄의 협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침묵을 지켰으나 89년 소련군이 철수하자 파키스탄에 대한 압력을 본격화했다. 당시 부토 전 대통령의 딸 베나지르 부토 총리는 이같은 압력에 굴복, 우라늄 농축작업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베나지르 총리는 그러나 중국의 지원을 받아냈고 중국덕분에 파키스탄은 현재 차스마 인근에 300㎿급 가압수로형 원전을 건설중이다. 파키스탄은 현재 보유한 양으로는 원자폭탄을 10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파키스탄은 이란과의 접경지역인 발루치스탄지역의 차가이에 핵실험장까지 설치했다.
파키스탄은 또 4월 핵탄두 탑재능력을 가졌고 인도 전역을 목표로 할 수 있는 가우리 미사일(사정거리 1,500㎞)의 실험발사에도 성공했다.
결국 핵을 가지려는 파키스탄의 오랜 꿈은 실현됐다. 그러나 핵주권의 대가로 국제적으로 고립돼 많은 것을 잃을 것이라는 점도 분명하다. 서남아는 이제 국제사회가 한시라도 눈을 뗄 수 없는 세계 최대의 화약고가 돼가고 있다.<이장훈 기자>이장훈>
◎각국 반응/美 “실망”… 中,사전통보 받고 침묵
○…핵실험을 저지하기위해 특사파견 등 총력을 기울여온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은 28일 『나와즈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에게 핵실험을 자제하도록 설득했으나 핵실험을 강행해 매우 실망했다』며 『파키스탄은 비용을 들이지 않고 방위력을 증강할 기회를 상실했다』고 밝혔다. 클린턴 대통령은 또 『앞으로 전개될 서남아시아 지역에서의 핵개발 경쟁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11일과 13일에 걸쳐 5차례 핵실험을 실시해 파키스탄의 핵실험을 촉발시킨 인도는 이날 파키스탄이 핵실험을 실시할 줄 예상했다면서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 인도총리는 『파키스탄의 핵실험은 인도가 이달 중순 실시한 핵실험이 정당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고 말했다.
○…28∼29일 양일간 일정으로 룩셈부르크에서 열리고 있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의에 참석한 회원국 외무장관들은 회담중 파키스탄의 핵실험 실시 소식을 전해듣고 놀라움을 표시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무장관을 비롯한 NATO 외무장관들은 『파키스탄의 핵실험은 매우 위험한 상황을 만들었으며 NATO회원국들은 핵실험에 대한 비난과 함께 매우 강경한 대응조치를 취할 것이다』고 강조했다.
○…일본 정부는 파키스탄 핵실험 실시에 대한 사실을 확인한후 파키스탄에 대한 경제제재 조치를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파키스탄의 핵기술을 지원해온 것으로 알려진 중국은 파키스탄 정부로 부터 핵실험 실시를 사전에 통보받았으나 이에 대한 논평은 일체하지 않았다.<워싱턴 뉴델리 룩셈부르크 도쿄 외신="종합·배국남" 기자>워싱턴>
◎핵개발 주도한 압둘 카디르 칸/70년대부터 연구 ‘이슬람 원폭의 아버지’
파키스탄 핵개발을 주도한 압둘 카디르 칸(62) 박사는 파키스탄에서 「이슬람 원폭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84년 그가 파키스탄 핵개발 능력을 갖게 됐다고 발표했을때 감격에 찬 파키스탄 학생들은 혈서를 써 흥분을 나타낼 정도로 그에대한 파키스탄 국민들의 지지는 전폭적이다. 이런 국민들의 부응에 화답이라도 하듯 그는 최근 인도 핵실험에 대응해 긴급소집된 대책회의에서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핵을 가질 수없다』며 외압에 굴복하지 말고 실험을 강행할 것을 역설하기도했다.
그는 그러나 서방세계로부터 외국의 핵기술을 훔친 스파이취급을 받고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문제아로 규탄받고 있다. 83년 비밀해제된 미국무부 문서에 따르면 그는 네덜란드에서 우라늄 농축기술을 훔치고 위장회사를 차려 국제적으로 수출이 금지된 핵관련 기술을 밀입수했다. 72∼75년 네덜란드의 우라늄 농축관련 회사에 근무했던 그는 76년 귀국해 회사동료에게 비밀기술 전수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고 네덜란드 당국은 그를 스파이혐의로 기소했다. 83년 궐석재판에서 4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실제 형을 살지는 않았다. 현재 칸 연구소 소장인 그는 각종 무기 연구와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김정곤 기자>김정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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