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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구리시 동구릉(나들이 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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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구리시 동구릉(나들이 학습)

입력
1998.05.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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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만평의 수려한 풍광… 조선 아홉임금 모신 명당조선왕조 500년의 통치이념은 성리학. 임금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사상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왕릉이다. 31일 끝나는 TV드라마 「용의 눈물」로 관심이 더욱 높아진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사적 제193호)등 왕릉 9기가 모여 있는 동구릉(경기 구리시)을 역사탐방연구회 회원 김경선(정보기술교육원 근무)씨의 안내로 찾아가 보자.

당시 묘자리를 정할 때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풍수지리를 가장 중시했던 만큼 북한강을 끼고 59만평의 산야에 넓게 자리잡은 이 곳은 풍광이 수려하고 지세 또한 뛰어나다. 이 곳에 태조의 능을 비롯 「왕들의 공동묘지」가 만들어지게 된 데는 태조와 태종의 갈등도 한 몫 했다. 태조는 사랑했던 계비 신덕왕후 강씨와 함께 묻히기를 바랐지만 계모 강씨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태종이 아버지의 유언을 어기고 이 곳으로 무덤을 정했다는 것. 세자로 봉해졌던 방석의 어머니 신덕왕후는 「용의 눈물」의 하이라이트에 속했던 왕자의 난등 권력투쟁에서 희생된 인물이기도 하다. 태종은 이에 그치지 않고 태조가 무덤이라도 가까이 하기 위해 성 안에 능을 만들지 않는 관례까지 깨고 경복궁 근처에 조성한 강씨의 무덤(현재의 서울 중구 정동)을 파헤쳐 한양바깥(현재의 서울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겼다.

이렇게 부자갈등이 심했지만 태종은 태조의 능을 만들면서 마지막 효도를 했다. 고향 함흥을 그리워했던 태조의 묘에 함흥의 억새풀을 입혔다. 다른 능의 풀은 모두 파릇파릇한 잔디지만 건원릉만 보라색 억새풀로 덮인 이유이다.

묘자리와 관해서는 다른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말년의 태조가 무학대사와 함께 명당자리를 찾아 헤맨 끝에 이 곳을 발견하고는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언덕에 앉아 쉬면서 『무덤자리도 잡았으니 모든 근심을 잊겠다』고 해 그 곳 지명이 「망우리」가 됐다고 한다.

동구릉에 모셔진 왕은 태조를 비롯 문종 선조 인조 현종 영조와 세자때 죽어 나중에 왕으로 높여진 문조, 헌종등 아홉 임금. 조선초에서 말기까지 걸쳐 있지만 왕릉의 양식은 비슷하다.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왕릉입구에 세워진 홍살문. 귀신을 쫓기 위해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다. 능주변을 둥근 담(곡담)이 에워쌌으며 호랑이 양등 길한 동물의 형상을 딴 석상이 세워져 있다. 홍살문과 능 사이에 자리잡은 정자각은 제사를 지내는 장소다.

주의깊게 살펴볼 것은 봉분 아래를 병풍처럼 두른 호석(護石). 12면의 호석에는 12지신상이 새겨져 있다. 정북향을 가리키는 쥐, 정동향의 토끼, 정남향인 말, 정서향인 닭등 12지신은 방위를 표시하기도 한다. 서양과학을 받아들인 이후 지금은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사용하지만 옛날사람들은 자축인묘등 12방위를 사용했다. 자연을 대하는 우리 조상들의 시각이 훨씬 정교했음을 이런 점에서도 알 수 있다.<김동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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