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신경제에서 환란까지:6(문민정부 5년:28)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신경제에서 환란까지:6(문민정부 5년:28)

입력
1998.05.25 00:00
0 0

◎朴수석,150만원짜리 ‘新경제’용어 집착/YS신임 업고 경기부양책 ‘新경제 100일계획’ 입안/‘체력보강후 수술論’에 일선부처 ‘목욕탕 수리論’ 맞서/朴수석 논리수정 불용·독주… 失政의 전주곡으로『우리 경제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을 때 「신(新)경제」건설을 위해 함께 뛰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

93년 5월1일 새벽 과천 중앙공무원교육원 운동장.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은 「신경제 합숙토론회」에 참석한 11명의 장관, 경제담당 고위공무원 100여명과 4㎞를 함께 뛰며 「경제대통령」을 다짐했다. 퇴임직전 환란(換亂)을 불러 경제실정의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5년전은 너무도 당당했다.

그 행사 전날밤. 박재윤(朴在潤) 청와대경제수석은 장관들까지 청중으로 한 특강에서 김대통령을 한껏 치켜세웠다.

『김대통령은 집권에 앞서 집권기의 경제정책에 관한 500여쪽의 마스터플랜을 만들어 취임한 우리나라 최초의 대통령입니다. 김대통령은 지금까지 어떠한 경제전문가도 창안할 수 없었던 매우 중요한 두가지 경제정책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정치자금을 한 푼도 안 받기로 한 것과 공직자 재산공개가 바로 그것입니다. 「신경제론」은 김대통령의 통치철학을 경제정책론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92년 6월 서울대 교수직을 버리고 「YS캠프」에 합류한 박수석. 그는 「신경제」를 입안한 「준비된」경제참모였다. 「황소같은 머슴」으로 불릴 만큼 대통령에게 헌신적이었고, 대통령의 신임도 두터웠다. 때문에 자신만만했고, 거침이 없었다. 경제에 관한한 「일인지하 만인지상이었다.

재정경제부 간부의 회고. 『청와대(박수석)의 독주를 막을 곳은 아무 곳도 없었습니다. 부총리나 재무·상공장관 모두 온건한 스타일이었죠. 박수석은 대선을 치르는동안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있었던 터여서 …』 초대 경제팀은 박수석 구상에 따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그는 이경식(李經植) 부총리 홍재형(洪在馨) 재무 김철수(金喆壽) 상공 등 경제팀 인선에 관여했음을 숨기지 않았다. 박수석은 『새 경제팀은 역대 어느 팀보다 팀워크가 고려됐다』고 강조했다.(박수석은 그러나 최근 이를 비롯한 당시 상황에 대해 답변을 피했다)

「신경제」작업은 92년 6월 김전대통령이 민자당 대선후보로 결정된 후 박수석을 경제특보로 임명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작업에 참여했던 김중수(金仲秀) 박사의 설명. 『박재윤씨가 특보로 임명된 직후 전화를 했습니다. 도와달라는 것이었는데 처음엔 다른 사람을 추천하자 만나자고 했습니다. 민자당 특보실이었죠. 곧 44개 개혁과제가 선정됐습니다. 저녁에만 모여 과제별로 세부안을 만들어 갔습니다. 노조위원장 금융계 인사 등 과제별로 관련인사를 초청해 실상도 점검했습니다. 비공개로 진행됐습니다』

김박사의 계속된 설명.『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이 민자당을 탈당한 이후 KDI 국민경제연구소장을 맡고 있어 한동안 작업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해 12월18일 김대통령이 당선된 후 재합류했고, 그 무렵 「신경제」가 성안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박영철(朴英哲) 금융연구원장 유장희(柳莊熙) 대외경제정책연구원장 박종기(朴宗淇) 인하대교수 강광하(姜光夏) 서울대교수 등이 핵심멤버였다. 이 때 만들어진 보고서는 「신경제 5개년계획」의 골격이 됐다.

93년 3월초 경제수석실. 『모든 보고서에 신경제를 「新경제」로 표기해 주십시오. 「신」은 반드시 한자로, 경제는 한글로 해서 꺽쇠를 씌워야 합니다』 강봉균(康奉均)경제기획원 차관보를 비롯, 참석자들은 말문을 잃었다. 계획에 담길 내용에 대해서는 별다른 지적이 없었다.

당시 배석했던 경제기획원 출신 K과장의 회고. 『바쁜 사람들을 불러 모아놓고 고작 표기문제를 들고 나오는데 할 말이 없었습니다. 박수석은 또 「보고서는 한 페이지당 가급적 한단락 4줄씩, 16줄로 통일해 달라」는 주문도 했죠. 일부 인사가 「그건 수석실에서 해도 되는 것 아닙니까」라고 반발했지만…』

비서관을 지낸 K씨의 설명. 『박수석은 「신경제」용어에 대해 상당한 애착을 가졌습니다. 150만원을 들여 광고대행사에 의뢰해 만든 것입니다』 박수석이 용어에만 집착한 것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10여일뒤 서울 용산의 모 여관. 박수석과 경제수석실 비서관, 강차관보 등이 밤늦게 모였다. 당시 박수석은 저녁약속이 있는 때는 모임이 끝난후 여의도내 모 호텔이나 용산의 여관 객실에서 기획원 사람들과 만났다.

『다시 해 오세요』 『벌써 몇번째입니까. 제 체면도 있지 않습니까』 박수석은 기획원 보고서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계속 수정을 요구했다. 업무에 관한한 빈틈이 없기로 소문난 강차관보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특히 「신경제 5개년계획」에 앞서 추진하기로 한 「신경제 100일계획」은 경기부양책으로 이와 정반대의 안정화정책을 추진하던 강차관보로선 수용하기가 쉽지 않았다. 금리인하와 투자진작을 통한 경기활성화를 염두에 둔 신경제 100일 계획은 요즘들어 「환란」의 시발점으로 해석되고 있지만 당시 박수석은 막무가내였다.

『개혁과 변화라는 수술을 받으려면 어느 정도 체력이 뒷받침돼야 하기 때문에 먼저 체력을 보강하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

박수석은 청와대비서진에게 「내과 수술론」을 들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몸이 허약할때 수술을 하면 환자가 죽을 수 있는 것처럼 건강상태가 좋을때 수술을 해야 성공률이 높다』 개혁이전에 경기를 어느 정도 살려 놓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물론 경제부처에선 「목욕탕 수리론」으로 맞받아쳤다. 목욕탕수리는 손님이 없는 여름철에 하듯 경기가 바닥에 있을 때 경제개혁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여론이 좋지 않다고 해서 경기부양책이라는 표현을 쓰지 못했지만 사실은 인위적인 경기부양이었다. 결과적으로 그 정책 때문에 지금 경기가 살아나지 않았는가』(94년 6월11일 금융학회주최 워크숍에서 박수석의 설명)

박수석은 한번 자신의 논리로 정리한 사안에 대해서는 「수정」을 용납하지 않았다. 일종의 학자출신에서 나타나는 고집이기도 했다. 더구나 신경제 100일 계획은 「0303」회의에서 김대통령의 공식재가까지 받은 사안이었다.

김대통령은 취임후 첫 외부행사로 3월3일 과천청사에서 경제장관회의를 주재했다. 「신경제」관련 첫회의였다. 김대통령은 이날 박수석이 만든 신경제 보고서를 기초로 신경제 100일계획을 21일까지 완성하여 22일부터 실시하고, 향후 5년동안의 경제개혁 및 경제운영에 관한 신경제 5개년계획을 6월말까지 완성, 하반기부터 실시할 것을 지시했다. 박수석이 회의날짜를 정했고, 지시사항도 그가 손 본 것이다.(박수석은 신경제추진회의 등 각종 행사의 참석범위 좌석배치 보고순서 보고내용 등을 직접 결정했다. 대외적으로 주무부처인 기획원은 「들러리」에 불과했다) 그 자리에서 이부총리는 「현 경제상황의 진단과 대응과제」를 통해 의중에도 없던 『경제성장률이 지난해 하반기부터 3%대로 저하하고 있기 때문에 안정기조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적정수준까지 경제성장을 제고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고 건의했다. 전직 고위 관리 ㄴ씨증언.『경제라는게 목표를 정해놓고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대충 얼개만 세워두면 됩니다. 군사작전도 아닌데 100일계획을 만들어 두고, 그것도 부양에 초첨을 맞추었으니』 신경제 100일계획은 신경제 5개년계획, 문민경제 실정의 전주곡이었다. 경제위기의 원인으로 꼽히는 「잠재성장을 웃도는 성장」이 이 시기에 싹튼 것이다.<정희경기자>

◎‘신경제’ 과연 뉴플랜인가/92년 6월부터 千여명 작업/“7차 5개년계획과 유사 철학없이 포장만 바꿨다”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이 취임한 93년 미국에선 빌 클린턴 행정부가 출범했다. 두 대통령의 최대 과제는 경제회생. 클린턴은 로버트 라이히 하버드대교수와 클린턴노믹스, 김대통령은 박재윤(朴在潤) 전서울대교수와 「신(新)경제」를 각각 돌파구로 삼았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또 『임기 5년의 평가가 「신경제」에 달려있다』고 박수석을 독려했던 김대통령은 퇴임후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신경제」의 골자는 정부의 지시와 통제가 아닌 국민의 참여와 창의를 통해 재정·금융·행정·경제의식을 개혁, 성장잠재력을 강화하고 국제시장기반을 확충하며 국민생활여건을 개선한다는 것. 92년 6월부터 1년 가까이 각계 인사와 경제전문가, 경제부처 공무원 등 1,143명이 작업에 참여했다. 정치민주화와 경제자율화의 정상적인 결합이며,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치켜세워졌던 신경제는 과연 뉴 플랜(NEW PLAN)이었나.

『96년께 신경제 장기구상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받고 「신경제 5개년 계획」과 92년 만들어진 「7차 경제사회개발 5개년 계획」을 비교한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 내용이 비슷했고, 어떤 대목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더군요』(경제부처 K씨)

『청와대가 제시한 초안을 받아보고 아이디어들이 산만하게 나열돼 있어 큰 원칙을 세우고 가닥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나중에 보니 바뀐 게 없었습니다. 철학없이 보기좋게 포장만 한 것입니다』(초기 신경제 작업에 참여했던 Y씨)

당시 핵심라인에 있었던 인사들은 『경제회생에 필요한 개혁과제들이 망라돼 있었고, 내용도 좋았다. 실천이 안됐을 뿐이다』고 주장하고 있다. 「신경제」는 그러나 첫해부터 목표궤도를 벗어나 조로(早老)현상을 보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