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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제에서 환란까지:5(문민정부 5년: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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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제에서 환란까지:5(문민정부 5년:27)

입력
1998.05.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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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 재경원’ 위험한 독주 換亂잉태/물가·환율관리 단일화 폐단,견제·균형기능 상실/양부처출신 갈등도 심각,정책표류 등 난맥상 노출/밖으론 “무소불위”… 他부처 예산타내기 로비 급급재정경제원이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던 95년 9월. 건설교통부에는 한장짜리 괴문서가 나돌아 관계자들을 바짝 긴장케 했다.

「대(對) 재경원 행동수칙」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문서는 당시 재경원의 드높았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떳떳하게 행동하자. 밥 사지 말자. 업무를 사전에 잘 챙겨 논리싸움에서 지지말자』는 내용이 골자인 이 문서는 당시 정부부처 관계자들 사이에서 일대 화제를 낳았다.

당시 이문서를 만드는 데 참여했던 공무원의 증언. 『재경원에 모든 권한이 집중된 데 따른 갖가지 부작용을 공론화하고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문서를 만들었지요. 하지만 계란으로 바위치기였습니다』

재경원은 기형적인 출생과정은 뒤로 한 채 출범 이후 「정부부처를 통솔하는 부처」로서 막강한 파워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경제기획원과 재무부에 나뉘어져 있던 예산 세제 금융 정책조정 등의 「경제 4권」을 한 몸에 지니게 됐기 때문이다. 경제기획원과 재무부간의 견제와 균형기능은 사라지면서 거칠 것 없는 독주자로 변신했다. 환란(換亂)을 향한 재경원의 위험한 행보는 이미 이때부터 시작됐다.

재경원 출범 초기, 요직을 지냈던 인사의 회고. 『무리한 통합에 따른 부작용은 예상보다 컸습니다. 경제기획원과 재무부에서 각각 맡았던 물가와 환율의 관리주체가 재경원으로 단일화된 데 따른 폐단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물가안정 지상주의에 밀려 경상수지 적자가 쌓이고 국제경쟁력이 떨어지는 데도 환율은 요지부동인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됐습니다』

재경원은 실제 물가안정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적정 환율을 유지하는 데는 완전히 실패했다. 경상수지는 94년 38억달러의 적자를 기록한 이후 95년 85억달러, 96년 230억달러로 적자폭이 늘어나기만 했다. 그러나 미 달러 대비 원화환율은 94년 평균 803원, 95년 771원으로 오히려 내렸고 96년에는 804원이었다. 적자폭은 늘어가는 데 원화의 값은 강세가 지속되면서 수출경쟁력은 추락하고 과소비는 꺾이지 않는 상황을 자초했다.

조직 내부의 혼돈은 더욱 심각했다. 현 재경부 고위관계자의 증언. 『재경원 출범 초기부터 외환보유고 환율 등의 외환시장 관리기능은 금융정책실이, 국제수지분야는 1차관보 산하의 경제정책국이 각각 맡아 외환부문에 대한 통합적인 관리가 불가능했습니다. 외환분야의 업무를 관할하는 1급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장관과 차관이 아니면 이를 조정할 수 없었던 셈이지요. 외환쪽에서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 집안에 어머니가 두명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또 재경원이 존재하는 동안 장관(경제부총리)이 네번이나 교체됐다. 이들의 재임기간은 평균 8개월 남짓. 업무를 파악할 만하면 옷을 벗게 돼 조직의 통합적인 운영은 아예 기대할 수 없었다.

통합적인 외환관리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재경원 내부에서도 제기됐으나 자기성찰능력을 상실한 재경원은 환란직전까지도 자신의 환부(患部)를 인식하지도 못했고 칼을 대지도 못했다.

조직의 난맥상을 드러내는 재경부 간부의 또 다른 회고. 『부처 통합 이후 기획원측과 재무부측은 인사교류를 하기로 암묵적인 합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양 부처 출신 직원의 전문성과 업무특성은 고려되지 않았지요. 이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특히 기획원쪽에서 일 잘하던 직원을 금융파트에 배치하다 보니 기본능력과는 상관없이 전문성이 떨어져 오류가 발생했고, 이것이 환란의 원인이 된 것도 사실입니다』

부처 통합 이후 양 부처출신 사이의 불협화음은 장관이 나서서 무마해야 할 만큼 심각했다. 재경원 초창기 금융정책실에서 일했던 관계자의 증언. 『조직의 문화와 업무특성이 매우 다른 사람들은 모아놓고 뒤섞다 보니 마찰이 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출신이 다른 직원들간에는 업무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책이 표류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초대 장관을 지낸 홍재형(洪在馨)씨는 이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기획원과 재무부 출신들간에 술자리를 자주 갖도록 지시를 내릴 정도였습니다』 양부처 출신들은 화합을 위해 단합대회까지 가졌으나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의 계속되는 증언. 『양 조직의 인사체계가 다른 점도 상당한 부작용을 야기했습니다. 통합이전에는 기획원이 재무부에 비해 승진이 빠른 편이었어요. 통합 후에는 절충점을 찾기 위한 인사를 하다보니 승진이 늦었던 재무부 출신의 승진은 더 늦어지고 기획원 출신도 통합이전 보다는 승진이 더디게 돼 불만이 팽배했습니다』 공무원 사회의 최대 목표가 승진인 점을 감안하면 재경원 직원들에게 통합이후의 인사는 상당한 스트레스로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경원의 거침없는 독주는 계속된다. 안으로는 곪아가고 있었지만, 정부내에서 그 비대해진 몸집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이미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대들었을 경우 불이익 또한 적지 않았다.

재경원과 업무협의를 자주 했던 경제부처 고위 관계자의 기억. 『특히 매년 가을 예산철이 다가오면 재경원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지요. 각 부처가 예산을 더 타내기 위해 갖가지 채널을 통해 재경원 로비에 나섰고, 몇몇 인사들은 재경원 관계자들에게 봉투까지 갖다 바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산 배정은 그들의 고유권한이었기 때문에 꼼짝할 수가 없었지요』

그의 또다른 증언. 『업무협의 과정에서 대들거나 그들의 권위를 훼손할 경우 그만큼의 대가를 치뤄야 했습니다. 장관과 차관의 판공비를 깎는 등의 방법으로 부처 길들이기에 나서기도 했고, 재경원이 1년단위로 심사·배정하는 부처 직원의 출장비 책정에서도 손해를 볼 수도 있었어요』

옛 통상산업부 관계자의 증언. 『재경원은 일정수준의 물가상승률을 정해놓고 모든 물가정책을 결정했기 때문에 반드시 올려야 하는 공공요금 등을 인상할 수 없었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환율을 적정수준으로 내려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지만, 이 역시 물가논리에 밀려 현실화되지 못했습니다. 과거와 같이 경제기획원과 재무부가 견제와 균형을 유지했었다면 이같은 불행한 결과는 없었을 것입니다』

『환란의 원인 규명은 재경원 출범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재경원이 탄생하면서 외환을 비롯한 경제정책이 어긋나기 시작한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첫 단추가 분명히 잘못 끼워졌지만 이를 수정하려는 노력도 전혀 없었습니다』 현 재경부 직원의 자기비판이다.

재경원은 공룡처럼 자신의 비대해진 몸집을 주체하지 못해 멸망했다. 그러나 거대한 몸집이 넘어지면서 주변에 입힌 피해는 엄청났고, 아직도 그 혈흔이 생생하게 남아있다.<김동영 기자>

◎역대 재경원 장관/경상적자·종금사전환 한보사태·기아사태 등 환란가는길 ‘바통터치’

재정경제원 장관을 지낸 사람은 총 5명. 이들이 주도했거나 재임기간에 벌어진 사건들을 돌이켜 보면 재경원이 환란을 향해 걸어 간 발자취가 한눈에 드러난다.

재경원 초대장관은 경제기획원장관과 재무부 장관을 두루 지낸 홍재형(洪在馨)씨. 원만하고 무색무취하다는 주변의 평가답게 재임기간 동안 특별한 실책은 없었다. 그러나 그가 경제부총리를 맡은 94년부터 흑자기조를 유지해 온 경상수지가 적자로 돌아선다.

96년 8월 바통을 이어받은 나웅배(羅雄培) 장관 시절부터는 환란의 싹이 머리를 내밀기 시작한다. 그가 재임한 동안 2차 종금사 전환이 무더기로 이뤄졌고, 96년 한해동안 사상최대규모의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했다.

그 뒤를 이은 한승수(韓昇洙) 장관도 책임을 면키 어렵다. 재임기간중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가입이 확정돼 국민들의 「선진국 몽상」을 키웠고, 지난해 1월에는 한보사태가 터져나와 환란을 자초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한보사태 해결임무를 띠고 부총리에 오른 강경식(姜慶植)씨. 그는 한보사태를 처리하기는 커녕, 기아사태 외환위기 등과 관련된 개인적·정책적 「실수」로 영어(囹圄)의 몸이 됐다.

결국 임창렬(林昌烈) 장관은 국제통화기금(IMF)에 손을 내밀었지만, 장관 취임 당시 「IMF행(行) 인지여부」를 놓고 시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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