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하르토의 3남인 아무개가 소유하고 있는 항공사 비행기를 타고 차남이 건설한 자카르타 국제공항에 내린다. 이어 차녀가 대주주인 은행이 운영하는 환전소에 들러 돈을 바꾼 뒤 장녀가 경영하는 운수회사의 택시를 타고 차남 소유의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 숙박한다. 호텔로 가는 길은 몇째가 운영하는 유료도로. 호텔방에 앉아 TV를 켜면 또 몇째가 회장인 방송국의 뉴스가 나온다」한국일보 5월 19일자(11면·일부 지역)에 보도된 내용이다. 인도네시아의 문제 중 하나인 수하르토의 족벌경제체제를 이처럼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은 없을 것이다. 가히 거대한 「수하르토 주식회사」다. 뉴욕타임스의 한 칼럼니스트는 이렇게 꼬집었다. 『수하르토 일가는 모든 것을 갖고 있다. 단 한가지, 수치심만을 빼고는』 수하르토와 3남3녀의 재산은 400억달러. 국제통화기금(IMF)이 이 나라에 투입하는 구제금융(430억 달러) 규모와 맞먹는다.
20일자 한국일보(3면·일부 지역)에 실린 사진. 자카르타의 국회의사당 앞에서 수하르토의 대형 허수아비를 들고 시위하는 1만 5,000여 대학생들. 허수아비에는 이렇게 쓰인 현수막이 매달려 있다.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국민은 당신의 노예(Slave)와 장난감(Toy)으로 사는 것에 지쳤습니다. 당신의 결정에 복종하는 것에도. 우리는 당신이 정말 지겹습니다』
이 두 기사와 사진은 인도네시아의 경제와 정치상황을 한 마디로 함축한다. 매일 매일 급변하는 인도네시아 사태와 씨름하느라 자정이 넘어 집에 돌아가는 생활이 일주일이 넘었다. 지친 사람은 인도네시아 국민 뿐이 아니다. 국제부 기자들도 지쳤다. 오늘이냐, 내일이냐, 아니면 언제냐. 수하르토의 사임시기를 놓고 매일 저울질하다 보면 인도네시아 국민과 심정적 유대감까지 느끼게 된다. 수없이 쏟아지는 자카르타발 전송 사진에 우리의 과거가 오버랩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생각을 돌려 본다.
아시아에서는 태국을 시작으로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우리나라가 차례로 IMF구제금융이나 차관을 받고 있다. 이 네 나라 중 유독 왜 인도네시아만이 소요와 폭동으로 치닫고 있는가. 평범한 교훈일지 모르나 결론은 역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다.
오랜 독재에 시달린 필리핀(86년)과 우리나라(87년) 태국(89년)은 「피플 파워」를 통해 80년대 후반에 민주화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정치가 안정을 이루면서 상대적으로 개발독재의 시대를 일찍 종식한 이 나라들은 IMF의 구제금융에 흔들리긴 했지만 폭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32년 수하르토의 독재정치와 족벌 독점경제에 예속된 인도네시아는 달랐다. IMF의 수술대에 오르기에는 너무나 허약한 체질이었다. 그래서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는 「IMF의 고의적 도발」이라고까지 말했다. 환자의 영양상태를 무시한 「독약처방」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대장성 자문그룹 역시 IMF가 인도네시아사태를 악화시켰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어쨌든 인도네시아가 민주주의를 이루었더라면, 국제사회가 경제개혁보다 정치개혁을 먼저 지원하거나 강요했더라면 인도네시아가 IMF의 메스 앞에 이처럼 요동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하르토는 이제서야 정치개혁을 약속하고 있다. 이것이 IMF를 내세운 미국의 「계산」이었는 지는 모르지만 인도네시아는 이제 가야할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엄청난 대가를 치르긴 했지만.
결국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함께 가는 것이다. 둘 중 하나를 희생해 온 「아시아적 가치」는 인도네시아를 끝으로 확실히 사망선고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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