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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세니에게 생긴 일(한국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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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세니에게 생긴 일(한국의 추억)

입력
1998.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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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지못할 한국경찰 ‘호위 해프닝’/美 국방장관 부인등과 軍차량 이동중 오토바이 4대 경호/양측 사전지침 없어 갈림길서 서로 3번이나 방향 엇갈려/당시엔 ‘포복절도’불구 상호의사소통의 중요성 깨닫게 해주한 미 대사로 부임한 첫 1년반동안 여러 다양하고 복잡한 이유로해서 매우 엄격한 사전 보안조치가 취해졌다.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군부쿠데타로 집권했고, 서울전역에서는 수많은 반정부 학생시위가 잇따랐다. 중국과 소련사이의 긴장관계도 갈수록 나빠지고 있었다. 우리는 통신암호를 통해 북한이 서울로 향하는 고위급인사의 방문을 방해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덧붙여 전대통령은 자신이 안보문제를 최우선으로, 잘 숙지하고 있다는 것을 한국을 방문하는 관리들이 알아주기를 바랐다.

아내 세니가 다른 고위급 관리나 그들의 부인을 맞아 영접할 때는 아내에게도 보다 강도높은 보안조치가 내려졌다. 캐스퍼 와인버거 미 국방장관과 그의 부인 제인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정말 웃지않을수 없는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이 일화는 상호 의사소통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점과, 정확한 통역이나 설명을 해주는 사람이 없을 경우 발생할수 있는 여러 문제를 실증적으로 예시해준 사례가 됐다. 또 오해로 인해 발생하는 웃지않을수 없는 한 전형(典型)이었으며, 당혹스러움의 원인이 되지 않도록 서로 노력해야 한다는 선례(先例)로 작용하기도 됐다. 후에 세니는 내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편지로 썼다. 아래 이야기는 그때 아내가 썼던 편지 내용이다:「그것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알지 못하게 하라는 것을 보여준, 단순하면서 전형적인 예였다. 나는 지금까지 자동차가 호위하는 퍼레이드를 받아본 적이 전혀 없었다. 그런 영광을 받는 사람은 오로지 국가원수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 국방장관 부인과 한미연합사령관 부인, 그리고 주한 미 대사 부인이 한꺼번에 출현하자 우리는 4명으로 구성된 오토바이 호위를 받는 주인공이 됐다.

와인버거 국방장관 부부는 대사관저에서 우리와 함께 머물렀다. 존 위컴 한미연합사령관 부인은 자신의 관저에서 출발해 군차량으로 우리를 데리러 왔다. 우리는 용산 미8군의 장교클럽 리셉션홀에서 남편들과 합류하기로 돼 있었다. 그 군부대는 대사와 내가 기거했던 「컴파운드 원」(註 대사 부대사 참사관등 주요 대사관 직원이 머무는 관저)과 좀 떨어져 있었다.

앤은 차에서 뛰어내려 한국풍의 우리 대사관저로 뛰어 올라왔다. 그리고는 우리가 기다리고 있던 「국빈 거실」에서 우리와 만났다. 우리는 곧 집사였던 현씨에게 인사를 하고는 두번째 서열인 권씨에게 지침을 알려주고는 떠났다. 권씨는 우리 작은 아들 브래들리와 동갑이었는데, 나와는 정말 아들처럼 빨리 가까워졌다. 우리 세여자는 그리고 나서 군차량에 올라탔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겠지만, 한국에서도 의전에 따라 앉는 장소가 정해진다. 나는 미 대사의 아내이고, 어느나라에서고 대사는 주재국에서 미 정부를 대표하는 서열 1위의 직책이었기 때문에 내가 대사의 자리인 뒷좌석 오른쪽에 앉았다. 대사가 그 자리에 앉아야 하는 이유는 많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보안과 관계가 있다고 했지만, 대부분은 전통적으로 내려온 관례때문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일본과 영국에서는 대사는 뒷좌석 왼쪽에 앉는다. 와인버거 부인은 미 국방장관의 부인이었지만 한국에서는 내가 그녀보다 서열이 높았다. 얼마나 기분좋은 일이었던지!

컴 부인은 미 운전병과 함께 앞자리에 앉았다. 정상적인 경우 우리 남편들이 이 차에 탈 때 언제나 경호원이 앉았던 자리에 위컴 부인이 앉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녀를 「무장경호원」이라고 놀렸다. 맞았다. 그들에게는 각기 경호원이 있었다. 미국에서는 미국인이 경호를 맡았다. 우리 주재국에서는 한국정부가 한국인을 (경호인으로) 제공했다. 「시크릿 서비스」(미 재무부 비밀검찰부;대통령 호위 및 위조지폐단속 업무를 맡음)는 워싱턴에서 대사들의 안전에 만전을 기한다. 이 모든 보안조치는 매우 중요했다. 왜냐하면 주재국에 위임받은 대사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를 바라는 나라는 없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대사관저 정문을 나와 컴파운드 원을 따라 나있는 조그만 길(옛날 한국 임금들의 숙소인 덕수궁을 둘러싸고 있는 조그만 샛길같았는데) 로 접어들었을 때, 오토바이와 함께 4명의 한국 경찰요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얼마나 놀랐던지! 나는 와인버거 부인이나 위컴 부인이 중요한 「거물」로 간주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한국같은 남성지배사회에서 우리가 그같은 호위를 받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것이 오해에서 빚어진 웃지못할 해프닝의 시작이었다. 왜냐하면 우리 차를 운전하는 미군 병장은 사전에 통과도로에 대한 지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대사관저에서 미8군까지 예전에 익숙하게 다녔던 길을 택했다. 매우 잘 훈련되고 놀랄만큼 예의바른 젊은 한국경찰관들은 우리 운전병과 대화를 나눌 능력이 없었다.

선임경찰요원은 우리가 문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다른 한명의 경찰관과 함께 장비를 정비하고는 우리 차보다 앞서 나아갔다. 다른 두 경찰관은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고 우리 차뒤에 따라붙었다. 그래서 우리는 앞뒤로 파란색과 하얀색이 섞인 제복을 입고 있는, 잘생긴 젊은 남자들의 호위를 받으며 서울도심의 미로와도 같은 복잡한 교통을 뚫고 나갈수 있었다.

그들은 분명히 자신들 임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고, 매우 진지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우리가 지금은 도심교통의 중심지가 된, 고대 도시의 유명한 상징물인 남대문에 도착해 그 둘레를 돌아 나갈때, 앞서 달리던 두 경찰관이 왼손을 쭉 뻗더니 왼쪽으로 급회전을 해버렸다. 그리고는 남산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우리 미군 운전병은 그가 예전에 항상 다니던 길을 통해 용산 미군부대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곧장 앞으로 내달렸다. 앞서 달리던 경찰관을 따르지 않은 그의 결정은 우리를 뒤따라오던 다른 두 경찰관에게 혼란과 놀라움을 가져다줬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더니 똑같이 왼쪽으로 방향을 꺾어 허겁지겁 앞서가던 선임 경찰관에 따라붙어 사정을 알려줬다. 그리고는 그들은 힘겹게 혼잡한 교통을 뚫고 남대문을 빙 돌아 다시 나왔다. 좌우로 오토바이를 흔들며 쫓아오는 모습이 무척 대담무쌍해 보였다. 아무튼 그들은 다시 우리와 합류했다.

모두들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그들은 다시 우리를 호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얼마나 오랫동안 (호위)할수 있을까? 일제 강점기 건축스타일의 잔존건물인 도심의 서울역사(驛舍)를 지나 우리는 왼쪽길로 자리를 잡다 언덕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다시 선택에 직면했다. 왜냐하면 꼭대기에서 두갈래로 길이 갈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도하던 경찰관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다시한번 왼쪽으로 급회전했다. 우리 운전병은 희희낙낙하며 곧장 내달렸다.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뒤따라오던 두 경찰관은 또 미친듯이 선임경찰관에게 쫓아가 우리가 뒤따라오지 않는다고 일러줬다. 오! 하느님, 엄청난 굉음을 내며 무서운 속도로 그들은 다시 우리에게 달려왔다. 또한번 얼마나 웃었는지! 차안에서 우리는 웃음을 참지 못한채, 다음엔 무슨일이 벌어질까 몹시 궁금해했다. 물론 우리는 이 4명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당황해하고 있을까 생각하고는 측은한 마음도 들었지만, 어쨌든 재미있는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리는 마침내 용산 미군부대에 도착했다. 정문을 지나자 응당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지 나와있던 모든 사람들이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4명의 경찰관이 우리를 호위하는 가운데 수많은 인사를 받는 것이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갔을 때 나는 내 두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머, 또다른 선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나는 웃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교통문제에 대한 또다른 딜레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확실히 자신할수 있었다. 장교클럽이 눈에 확연히 들어왔을 때, 남북으로 나있는 기지내 주요도로에서 조그만 도로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우리는 왼쪽으로 급회전해야 했다.

앞선 오토바이가 우리 차를 돌아보면서 우리 운전병이 어떻게 행동할지 알아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아하! 이번에는 그 미국친구가 어떻게 할지 알고 있다고. 곧장 갈 것이고, 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해야지』 그 경찰관은 내 생각에서 한치도 빗나가지 않고 그렇게 했다. 그는 다른 한명의 동료와 함께 곧장 갔고, 우리는 왼쪽으로 틀었다!

우리 세명의 기품있는 부인들은 이제 거의 포복절도할 지경이었다. 심지어는 눈물까지 나와 뺨을 흥건히 적셨다. 우리는 뒤따라오던 두대의 오토바이가 굉음을 내며 우리는 지나쳐 곧장 앞으로 내달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는 이후 그들이 어떻게 됐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소란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해하며 우리를 맞았던 남편들보다 더 놀란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리셉션장에 줄선채 양국의 군 가족들을 영접하면서 우리는 정말 재미있는 얘깃거리를 간직할 수 있었다.

되돌아보면 우리에게는 웃음거리처럼 보인 일이 호위업무에 최선을 다하려 했던 젊은 경찰관들에게는 굉장히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의 웃음소리는 적절한 것이었다고 할수 없을 터였다. 한국에서 손님격인 미국인들은 다른 사람의 감정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이 사건은 우리에게 상기시켜 줬다. 언어가 달라서 종종 생기는 오해의 웃지못할 일면을 모든 사람이 함께 공감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당혹감은 웃음거리의 대상이 되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것과 함께.<번역=황유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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