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淵徹 변호사 ‘특별규정 입법가능성’ 기고/“5·18특별법 손질하면 피해구제 가능”/기존규정 얽매이기 급급해선 안돼/‘시효정지기간’ 특별규정 설득력/판례변경도 신중한 검토 필요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일들이 그 시절에는 비일비재하였다. 언론사를 통폐합시킨다는 발상부터 그러했으려니와 담당기관이 보안사령부 언론대책반이었다는 것은 더욱 그러했다.
언론사 사주를 강박하여 본인의 의사와 동떨어진 문안으로 만들어진 각서에 서명날인 하도록 하였다. 만일 이에 끝까지 저항했다면 무자비한 고문을 초래하고 폐인이 되었다가 얼마 아니되어 사망하고 언론계의 순교자로 남아있게 되지 않았을까. 이때 폐간되거나 탈취당한 언론기관들에 대해 정당한 피해배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된다.
그러나 그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가 소멸시효기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기각되고 있어 법조인으로서 여러가지 생각케 한다.
소멸시효제도는 그 자체로는 굳이 흠잡을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경제사회의 변화속도가 매우 빠른 현대사회는 법률적으로 깨어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할 것이며, 권리의무관계에 대한 분쟁도 가능한 한 신속히 처리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제도가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등의 정권탈취와 그 시기의 사회적 작폐를 시정하는 데는 장애요인이 되고 있어서 문제다.
기존의 소멸시효 이론으로는 시효의 기산점이 어디인가, 바꾸어 말하면 시효정지의 사유가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법조계에서 깊이 검토하여 왔다. 나라에서는 피해자의 구제를 위해 시효의 이익을 포기할 의사는 아직 표명한바가 없는 것으로 안다.
형사재판에 있어서는 5·18특별법에 의해 전·노등에 대한 공소시효의 정지기간을 1993년2월24일 까지로 보았다. 그렇지만 위 법률과는 별도로 법원에서도 하급심에서는 1987년 6월29일을 장애사유종료일로 보기도 하였고, 대법원에서는 1981년 1월24일 비상계엄해제일로 보아 서로 다른 견해를 보였다.
민사소송에서도 하급심에서는 6·29선언시,1988년 2월25일 6공출범시, 같은해 12월 언론청문회개최시등 의견을 다양하게 표출하였다.
그러나 대법원에서처럼 비상계엄해제일로 보는 것은 바로 그날부터 군사정권의 권력이 공고히 확립되는 날인데도 국민들의 권리행사가 가능한 시기라고 보고 있는 것이어서 매우 부적합하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와같이 엄혹한 시기에도 국민들이 절대적 군사정권에 대항하여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신념과 기상을 견지하여야 한다는 반성적 촉구라면 몰라도 국가의 재정적 책임을 회피하고 국민들의 뼈아픈 손해를 고스란히 과거지사로 감수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6·29선언을 분수령으로한 그 이후부터 시효가 진행된다는 견해가 타당하게 보이는데 하나의 유력한 견해를 찾지 못하는 흠이 여전히 남아 있다.
대법원에서 비상계엄해제일로 되돌아 가버리는 이유도 다른 어느 시점의 설정이 상대적이라는데 그 이유의 하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사소송에서 시효의 기산일을 비상계엄해제일로 남겨 두는 것은 5·18특별법의 정신과 일치되지 않음은 명백하다.
5·18특별법은 비단 정권탈취의 주모자를 처단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 아니고 그로 인하여 재산과 명예를 상실한 국민들의 손해를 회복하여 주는 것도 기본적인 정신이다. 전·노등이 사면되었다하여 5·18특별법의 헌법적 선언이 흔들릴수도 퇴색될 수도 없을 것이다.
기존의 법률체계에 의하여 해결되지 못하는 문제에 관하여는 특별법에 의하여 전·노등을 처단한 것과 같이 특별법내에 손해배상청구권의 시효정지기간에 관한 규정을 삽입하여 시효항변을 배제시키고 나아가 손해의 산정방안도 규정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여 본다. 그러나 법원에서도 시효의 기산일에 대한 판례변경의 가능성을 신중히 검토하고 나라에서도 입법이전에 시효의 이익을 포기하는 방침을 생각하여 볼 것을 권고하고 싶다.
한편으로 전·노등의 행위로 인한 것을 국가의 불법행위로 보아 손해배상을 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하는 의문도 남는다. 그들은 뇌물수수건으로 몰수 및 추징판결을 받았으되 태반이 집행되지 않고 있다. 그들이 바로 배상책임자의 하나로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그리고 이사건의 본질은 민주적기본질서의 회복과 확립에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당대의 현장에서 투쟁하고 수호되는 이념이라야 살아있는 이념이 될 것이다. 탐욕의 무리들이 실컷 유린하고 권력과 부를 향유하고 물러난 이후에야 비로소 고개를 들고 뒷말을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나라에 대하여 배상책임을 묻는 것은 국민에게 책임을 구하는 것이다. 이사건에서도 역시 아쉬운 것은 그 당시 자유언론을 위한 순교자가 있어야 할 터인데 그렇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강제폐간 경위/신군부 정권찬탈의 ‘희생양’/5월초 언론통폐합등 집권계획 마련/11월12일 사주 연행 ‘포기각서’ 강요
80년 당시 서울경제신문은 경제교과서로 불릴만큼 국내에서 독보적인 경제정론지였다. 제작인력의 자질과 지면수준, 그리고 발행부수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경제지로 흑자상태의 건실 언론매체였다. 강제폐간 되기 직전 모 재벌기업이 250억원에 인수를 시도하려 했던 사실은 경제계에 널리 알려진 일화다. 서울경제신문은 당시 신군부가 언론통폐합조치의 명목으로 제시했던 부실언론의 정리와 사이비언론의 척결, 신문과 방송매체의 겸엄금지 등 그 어느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신군부는 80년 11월12일 오후 6시를 기해 당시 한국일보사 및 서울경제신문의 사주였던 고 장강재(張康在) 회장을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강제연행, 서울경제신문에 대한 경영권 포기각서 작성을 강요했다. 신군부측은 무장군인들의 삼엄한 경비에다 간첩수사 전담인 대공처 수사관들까지 투입해 『포기각서를 쓰지 않으면 여기서 나갈 수 없다』는 등의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결국 신군부의 강압에 못이겨 서울경제신문은 80년 11월25일자로 강제폐간됐다.
하지만 12·12 및 5·18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결과 이같은 신군부측의 언론통폐합조치는 「부실언론 정비」가 아니라 오로지 정권찬탈을 위한 사전정지 작업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신군부측은 80년 5월초 이미 집권계획인 「시국수습방안」을 마련했으며 그중 하나가 언론통폐합이었던 것이다. 이같은 방안마련을 주도한 인물은 바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었고, 허문도 당시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을 비롯, 보안사에서 권정달 정보처장 이학봉 대공처장 정도영 보안처장등이 적극 가담했다. 노태우 수경사령관 유학성 3군사령관 황영시 육군참모차장등 신군부 핵심인사들이 논의과정에 참여했던 사실이 확인됐다. 특히 전씨의 뒤를 이어 보안사령관에 취임한 노씨는 80년 11월12일 청와대에서 전씨가 언론통폐합을 최종 재가했을때 강릉 지방출장중에 헬기로 상경, 언론사 사주들로부터 포기각서를 받는 작업을 진두 지휘했음이 드러났다.<박정철 기자>박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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