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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제에서 환란까지:4(문민정부 5년: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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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제에서 환란까지:4(문민정부 5년:26)

입력
1998.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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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원’ 기습출범 불행의 씨앗/당시 행쇄위案에 ‘재경원’없고 ‘기획원 축소 존속’/기획원출신 한이헌 수석이 “재무부 통합” 전격 작업/“양부처 교류” 비전문가 기용 환율정책 등 표류 시작94년 12월3일, 토요일 오후. 초겨울 날씨로 쌀쌀했지만 경기 판교에 있는 호남정유(현 LG정유) 테니스코트에는 업무를 마친 재무부 국·과장을 비롯한 직원 30여명이 운동복 차림으로 모였다. 재무부 국·실 대항 친선테니스대회. 이들은 대회후 바비큐파티가 준비돼 있고 오랜만에 야외에 나온 터라 유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테니스대회를 막 시작하려는 순간.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는 재정경제원으로 통합, 건설부와 교통부도 통합…』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오후 2시 뉴스를 전해들은 이들은 손에 쥐었던 라켓을 팽개치고 일제히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리곤 소지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과천청사로 다시 뛰어들어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부처통합 배경을 캐느라 촉각을 곤두세웠다.

재정경제원이 탄생하던 순간이었다. 재경원 출범은 이렇듯 기습적으로 이루어졌고, 그 탄생과정 역시 순식간에 기형적으로 진행됐다. 그 결과 또한 참담했다. 탄생과정과 그 이후의 일그러진 모습을 유추해 보면 재경원은 출범시점부터 환란(換亂)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재경원 출범은 김영삼(金泳三) 정권의 행정쇄신위원회가 출범한 93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행쇄위에 참여했던 인사의 증언. 『행정개혁의 청사진을 짜는 데 참여해 달라는 청와대의 요청을 받고 위원으로 일하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상당히 의욕적으로 했지요. 그러나 행정기구 개편안이 언론 등을 통해 흘러나가자 공무원들이 크게 동요해 청와대측의 요청으로 일손을 놓았습니다. 8월에는 금융실명제가 튀어나와 행정개혁은 뒷전으로 밀렸지요』

계속된 증언. 『94년 봄에 들어서도 정치개혁법 통과에 여권이 힘을 쏟느라 행정개혁은 옛날 얘기로 치부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행쇄위원들은 자주 만나 행정개혁 방향에 관해 토의하고 단일안을 만들기 위해 애썼습니다』

물 건너가는 듯하던 행정개혁작업은 94년 11월 들어 호주 시드니에서 날아온 소식에 힘입어 가속이 다시 붙었다. YS의 세계화 선언이 그것이었다.

그 무렵 박동서(朴東緖) 당시 행쇄위원장에게 이의근(李義根) 청와대 행정수석(현 경북지사)이 급히 전화를 했다. 박 전위원장의 회고. 『세계화의 일환으로 행정조직을 개편해야겠으니, 빨리 안을 만들어 보고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위원들과 1년반 동안이나 논의를 해 왔기 때문에 개편안의 방향은 잡혀있었습니다. 그것을 손질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습니다. 그때가 11월25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9일후 정부조직 개편안이 확정, 발표됐다. 그러나 경제기획원과 재무부에 대한 정부의 개편 확정안과 행쇄위가 대통령에게 보고한 안은 전혀 달랐다.

박 전위원장의 설명. 『당시 기획원 기능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많았고 실제로 경제개발시대의 산물인 기획원을 방치할 경우 문제가 많을 것으로 분석했습니다. 때문에 기획원에는 기획기능과 예산기능만을 남기고 집행기능은 관련 부처에 넘겨줘 축소하는 최종안을 마련했습니다. 재무부는 금융과 세제에 대한 규제를 대폭 완화해 조직을 슬림화하도록 권유했습니다. 건설부와 교통부를 통합하는 안은 냈지만, 기획원과 재무부를 합하는 안은 물론 없었지요』

그러나 결론은 양 부처를 화학적으로 통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0일도 지나기 전에 대통령 직속기구인 행쇄위가 결정한 안이 뒤집힌 것이다.

왜 그랬을까. 당시 「재경원 만들기 작업」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어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행정조직 개편안이 발표되기 전부터 청와대에서 한이헌(韓利憲) 경제수석(현 국민신당 의원)을 중심으로 모종의 작업을 벌이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의 작업을 하는지는 까맣게 몰랐지요. 뒤에 알게된 얘기지만, 이들이 재경원 탄생의 산파역을 맡았다고 하더군요』 당시 청와대에 파견근무중이던 경제부처의 A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청와대와 업무상 교류가 잦았던 경제부처 B씨의 증언. 『정부조직 개편이 발표된 이후 대다수 공무원들은 그 배경에 초미의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청와대와 경제부처에서 나온 얘기들을 종합해 보면 행쇄위의 기획원 축소안을 감지한 기획원 출신의 한이헌수석과 청와대 멤버들이 자신들의 조직을 살리기 위한 대안으로 양 부처를 통합했다는 것이 결론이었습니다. 물론 그 작업은 순식간에 이루어졌지요』

공교롭게도 정부조직 개편이 기습 발표되기 한달여전인 10월21일에는 성수대교가 붕괴되는 참사가 발생했다. 때문에 성수대교 붕괴 파장을 최소화하기 위해 정부조직개편이라는 깜짝쇼를 연출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적지않았다.

그러나 당시 작업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인사들은 이를 한사코 부인한다. 한이헌의원의 주장. 『당시 일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옛날 얘기는 당분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알아서 판단 하시지요』 한의원은 시종 함구로 일관했다. 당시 청와대에 근무하면서 부처 통합작업에 관여한 것으로 전해진 C씨(기획원 출신) 역시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했다.

부처 통합시점에 청와대에서 일했던 D씨의 기억. 『한수석팀이 통합작업을 극비에 진행했다는 사실은 통합발표후 알 사람은 다 알게 됐습니다. 이들이 행쇄위가 기획원 축소안을 대통령에게 보고한 시점을 전후로(기획원 축소안은 행쇄위 보고 이전부터 떠돌았다) 통합작업에 착수한 점은 분명합니다. 이들의 통합작업은 치밀하고 교묘하게 진행돼 대통령이 행쇄위 안과 최종 확정된 안이 같다고 생각했다는 얘기도 파다했지요』

재경원 탄생의 정확한 스토리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있지만, 그 탄생 과정은 분명 기형적이었다. 짧은 시간에 무리하게 양 부처를 통합하느라 통합에 따른 부작용은 논의되거나 제기되지도 못했다.

『재경원은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채 3년여 동안 표류한 셈입니다. 양 부처가 무리하게 합쳐지면서 양 부처간 교류라는 명목으로 요직에 비전문가가 기용됐고 통합적인 조직관리도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때문에 경상수지 문제와 환율정책은 시종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현 재정경제부 고위 관계자의 회한이다.

또 다른 재경부 직원의 회고. 『통합할 때부터 배 밑창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부처 통합으로 환율과 외환보유고, 국제수지처럼 매우 중요하고 관련성 높은 사안을 담당하는 주체가 곳곳으로 분리돼 효율적인 국가살림살이는 불가능했습니다. 출범 이후 속으로 곪으면서도 3년 가까이 버틴 것이 다행일 정도입니다』<김동영 기자>

◎한이헌과 이석채/韓씨 재경원 산파役/李씨는 첫 ‘실세차관’/재경원과 함께 ‘침몰’

한이헌(韓利憲)과 이석채(李錫采). 재경원 출범 전후 양대 실세였던 두 사람이 거쳐간 인생역정은 재경원의 부침과 닮은 꼴이다.

부산출신인 한이헌 의원은 경제기획원에서 요직을 거친 후 90년 민자당 총재 경제특보를 지내면서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과 가까워져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공정거래위원장으로 올라섰다. 그 뒤 기획원차관에 이어 경제수석을 맡아 정부조직 개편을 주도했다. 이때가 그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정부로 돌아오지 않고 부산에서 출마,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그의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민자당에서 의정활동을 하다가 지난해말 대선 직전 이인제(李仁濟) 캠프로 이적했으나 이후보가 낙선하면서 그의 야심은 물거품이 됐다.

이석채 전 재경원 차관의 말로는 더 비극적이다. 재경원의 첫번째 차관을 지낸 그는 당시 김현철(金賢哲)씨와 경복고 동창 덕분인지 「장관보다 힘이 더 센 차관」이라는 평가를 받았었다. 그후에도 정통부장관, 경제수석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개인휴대통신(PCS) 등 통신사업 인허가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혐의로 검찰의 소환요구를 받고도 귀국(하와이 체류중)을 거부하고 있다.

두사람은 공교롭게도 재경원과 운명을 함께 했다. 한사람은 영향력을 상실한 국회의원으로, 또 한사람은 「수배자」 신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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