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학교 설립자인 남강 이승훈(南岡 李昇薰) 선생은 재단역할을 해주던 정주(定州)향교가 설립 1년여만에 학교운영에서 손을 떼 경영이 어려워지자 전 재산인 땅 몇마지기를 팔았다. 『우리가 굶는 한이 있어도 학교는 계속하셔야지요. 우리식구가 살 수 없으면 학교 기숙사에 가서 학생들 밥을 해주고 얻어먹고라도 살아야지요』 그때 자부가 했다는 말에서 절박했던 사정이 짐작된다.■1864년 평북 정주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열다섯살 때부터 보부상으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정직 근면 성실을 밑천으로 30대에 나라안에서 제일가는 무역상이 되었다. 큰돈을 번 그는 수릉참봉(水陵參奉)이라는 벼슬을 사 권세도 부려보았지만 러일전쟁으로 사업기반을 잃고 실의에 빠지게 된다.
■그무렵 미국에서 귀국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연설을 들은 것이 그의 인생행로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자기 한사람의 부귀와 공명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깨달은 그는 도산의 교육구국론을 실천하기 위해 오산학교를 설립하고 민족운동에 투신한다. 운명 직전 그는 『내가 죽거든 내 뼈를 표본으로 만들어 사랑하는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교육용으로 사용 하라』는 유언을 남겨 말 그대로 몸과 마음을 민족교육에 다 바쳤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가 스승의 날을 맞아 남강 선생을 제1회 겨레의 스승으로 선정, 13일 현창모임을 가졌다. 교총은 올해부터 교육선각자를 뽑아 겨레의 스승으로 추앙함으로써 사도의 귀감으로 삼기위해 처음으로 겨레의 스승을 선정했다고 한다. 대학총장들이 뇌물받은 혐의로 줄줄이 잡혀가고, 촌지물의를 겁낸 학교들이 교문을 걸어잠근채 학부모 출입을 사절하는 가운데 우울한 스승의 날을 맞게 됐다. 교직자들만이 남강선생을 겨레의 스승으로 추앙할 것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그 정신을 기려 제2의 교육구국 운동을 일으켰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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