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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제에서 환란까지:3(문민정부 5년: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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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제에서 환란까지:3(문민정부 5년:25)

입력
1998.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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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利權뒤에 小山있다” 줄대기 행렬/民放추진 거평,현철 대학동창에 10억 사기당해/이성호씨가 ‘小山行지름길’ 포철판매권등 “맹활약”/박태중씨도 돈되는 민원 마구 수주 “件當 4억”지역민방사업자 선정작업이 한창이던 94년 3월초. 거평그룹의 나선주(羅善柱) 기조실장(당시)은 디즈니여행사 대표라는 직함을 가진 김희찬(金熙燦)을 만났다. 『광주지역 민방에 관심을 갖고 있다구요』(김) 『그렇습니다. 도움을 좀 주시지요』(나) 『김현철과 친합니다. 다리를 놔볼테니 우선 5,000만원만 주시지요』(김)

거평 나실장이 10억원을 사기당하게 된 시발점이다. 각 기업들이 민방을 따내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뛸 때였다. 김현철과 연결되지 않으면 사업권이 불가능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거평 나실장에게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내에 김현철의 대학친구를 잘알고 있다는 모부장이 있었다. 김현철의 대학친구는 바로 김희찬이었고 그 부장과 김희찬은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김희찬에게 연락하도록 했고 그렇게 해서 나실장과 김희찬은 만났다.

김희찬은 만나자마자 『적극 나서겠다』며 착수금조로 5,000만원을 요구했고 얼마 있다가는 『잘되고 있으니 4억5,000만원을 추가해 5억원을 채워달라』고 했다. 선정 막바지가 다가오자 5억원을 추가로 요구했다. 모두 10억원을 달라고 한 셈이다.

나실장은 뭔가 좀 석연치 않았다. 일을 진행하는 것이 어설퍼 보였고 돈을 요구하는 방법도 『이게 아니다』 싶었다. 나실장은 김현철에게 직접 지금까지의 사정을 설명하고 싶었다. 수소문해 취지를 전하니 김현철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나실장으로부터 사정을 들은 김현철. 『김희찬이 아는 사람인 것은 맞다. 그러나 민방과 연관짓지는 마라. 당신같은 사람이 많다고 들었다』 이런 요지의 말을 듣고 돌아온 나실장은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끙끙 앓았다.

김희찬을 만나 『민방을 포기한다. 돈을 돌려달라』고 말했다. 『6억원 정도를 회수하기까지 한달여동안 김희찬의 집앞에서 밤새 기다린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회장한테는 보고도 못하고 혼자 해결하느라 고생 많았지요. 결국 나머지 돈에 대해서는 통장과 집 등 재산을 압류하는 형식으로 받아내 일단락지었고 남은 부분에 대해서도 나중에 갚겠다는 각서를 받았습니다』

민방에 참여하려던 거평은 비교적 순탄하게 일을 처리한 경우다. 『모든 이권사업은 김현철을 통해야 한다』는 소문이 나돌자 줄을 대려는 행렬이 끝도 없었고 이 과정에서 「사건」도 적지 않았다.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박관용(朴寬用·한나라당)의원의 증언. 『현철이가 실제 이권에 개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돈 때문에 개입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아는 사람, 봐 줘야 할 사람을 대상으로 일이 잘 되도록 주선했다는 정도가 맞을 겁니다』

김현철의 대표적인 개입은 신한종합금융건이다. 신한종금건이란 88년 김덕영(金德永) 두양회장측이 제일은행을 상대로 주식반환청구소송을 제기한 건과, 같은 회사를 놓고 국제그룹이 96년 김덕영을 상대로 「국제재산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고소한 건을 말한다.

김덕영의 주식반환소송은 1, 2, 3심을 거치는 동안 엎치락 뒤치락하다 6년여가 지난 94년 12월3일 김회장측의 승소로 막을 내렸다. 김현철은 이 과정에서 두양측이 승소하도록 안기부나 검찰 등 모든 실력기관들을 동원했다. 또 96년 11월 국제측이 김회장을 횡령혐의로 고발하자 다시 개입하다가 국제측으로부터 편지를 받고 물러서기도 했다.

김현철은 고속도로 휴게소 입찰이나 유선방송민방사업자 선정 등에 직간접적으로 깊이 개입했다. 부일이동통신이나 부산민방사업자로 선정된 한창의 김종석(金鍾錫) 회장은 김현철을 두번이나 만나 협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것은 몰라도 민방사업자 선정과정만큼은 김현철의 개입이 극히 제한적이었다. 관계자들은 『공보처의 원칙이 최대한 지켜졌다』고 증언하고 있다. 실제 김현철쪽 라인을 통한 정보가 틀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대전에서 민방사업권을 딸 것으로 예상되는 기업의 주식에 투자했던 K씨. 『민방관련주가 뛸 때였어요. 나름대로 김현철쪽의 정보망을 통해 예상업체를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확실하다고 믿은 몇몇 기업의 주식을 상당량 사두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선정업체가 아니었어요. 지금까지 주식투자로 가장 크게 낭패를 본 경우였습니다』

그러나 김현철은 물론 「김현철 사람들」의 위세는 대단했다. 문민정부 시절 크고 작은 이권사업에는 거의 모두 3∼4명의 최측근들이 있었다.

김현철의 위세를 가장 많이 이용한 사람은 이성호(李晟豪) 대호건설 부사장. 공개리에 김현철을 『현철이 형』이라고 불렀던 그는 한때 기업인들 사이에서 「현철로 가는 지름길」로 통하기도 했고 실제 그랬다. 김현철은 자신을 찾는 기업인들에게 『이성호에게 말하라』고 할 정도였다.

이성호의 활약은 눈부셨다. 각종 건설공사에 관여한 것은 물론 자신의 사업과 관련, 하도금대금 미지급건이나 세무조사 등을 「뒷심」으로 유리하게 몰아갔다. 93년 5월부터는 케이블TV사업자 선정에 개입, 1억5,000만원을 받기도 했다. 스스로 신아기획이라는 회사를 통해 서초유선방송 등 8개 케이블TV 사업권을 따내 이를 인수하고 동보스테인리스라는 철강판매사를 설립해 포철의 스테인리스 철강독점판매권을 획득했다. 못하는게 없을 정도였다.

김현철과 중학동창인 박태중(朴泰重)도 김현철을 등에 업고 많은 기업으로부터 돈을 챙겼다. 그의 돈챙기기는 96년에 집중됐다. 1월에는 이강년(李康年) 삼정건설회장에게 4억원을 받고 고속도로 휴게소 계약기간을 연장해 줬고 4월에는 태양생명으로부터 정보통신사업인 TRS사업자 선정에 도와달라는 명목으로 4억원, 9월에는 한국종합건설에서 인천지역 민방건으로 4억원을 각각 받았다. 그의 거간금액은 사안의 크기에 관계없이 건당 4억원이었다. 94년에도 민방선정과정과 세무조사 무마건 등 「돈되는 민원」이면 닥치는대로 「수주」해 「현철의 위세」를 120% 활용했다.

이런 박태중의 행동을 김현철은 몰랐을까. 김현철이 95년9월 자서전에서 밝힌 박태중. 「중학동창중 한 명이 나사본 사무국장을 맡았다. 다들 큰 감투로 알고 있으나 실제로는 조직의 총무같은 역할이다. 그는 인부들과 함께 칸막이공사를 하고 책걸상 등 물품들을 들여놓고 자질구레한 치다꺼리 일을 도맡아 했다. 친구가 좋아서 또 그 친구 아버지를 존경해 몇년동안 제돈 써가며 험한일 마다않고 고생했는데 거기에 마치 야심과 흑막이 있는 것처럼 오해받고 있다」 정말 그랬을까.

94년 6월.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 커피숍. 김기섭(金基燮) 안기부운영차장은 김현철과 조동만(趙東晩) 한솔부사장의 만남을 주선했다. 이날 만남은 한솔이 개인휴대통신(PCS) 사업권을 따내는 데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김차장은 정치나 군 관계 뿐 아니라 기업인들에게도 대단한 존재였다.

이들은 하나같이 돈으로 연결됐다. 특히 이성호와 조부사장은 김현철의 비자금을 직접 관리했다. 93년 10월 김현철은 20억원과 30억원이 든 통장 2개의 실명전환을 이성호에게 부탁했고 95년 8월에는 22억7,500만원을 예금통장과 수표로 세탁해 달라고 했다. 이성호는 이후부터 5차례에 걸쳐 세탁한 현금 5억원씩을 현철에게 건넸다. 박태중도 대선잔금 132억원을 관리했고 김기섭은 70억원의 자금을 관리했다.<이종재 기자>

◎문민정부 이권사업/한보철강·케이블TV 民放·PCS 허가 등 小山·측근 조직적 개입

김현철과 그의 측근들, 소위 「소산 마피아」는 각종 이권사업에 조직적으로 개입했다. 그들은 사업권의 인허가과정에 깊숙이 관여해 해당 업체들로부터 돈을 받고, 해당 부처에는 압력을 행사했다.

신규사업진출 삼성의 승용차사업권 확보와 한보의 코렉스방식 고로사업진출이 대표적이다. 현대가 금융부문을 강화한다는 차원에서 국민투자신탁을 인수하기도 했다. 한보가 철강사업에 진출하는 과정과 관련한 수사에서 김현철은 각종 수뢰 및 조세포탈혐의가 밝혀져 3년 실형을 선고받았다.

정보통신관련 포철과 코오롱이 이동통신사업권을 따낸 시기는 문민정부 전반기이며 국제전화 002 008이 허가됐다. 그러나 문민정부 기간에 가장 치열했던 경쟁은 개인휴대통신(PCS)이나 주파수공용통신(TRS) 등 정보통신 사업자 선정이었다. 재계의 빅4 그룹을 포함해 200여 크고 작은 기업들이 경쟁했던 이 사업은 결국 각 분야별로 31개업체를 선정하고 막을 내렸다. 그러나 선정과정에서 말도 많았고 각종 의혹도 숱하게 제기됐다. 결국 PCS의 경우 현재 법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각종 국책사업 유선방송(CATV)과 민방사업자 선정이 소산 마피아의 이권개입과 관련해 가장 말이 많았다. 방송의 다채널시대를 앞두고 각 기업들이 CATV 채널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고, 지역민방 역시 각 지역에 연고를 둔 크고 작은 기업들이 맞붙었다.

기타 사업 재정경제원이 6개였던 종합금융사를 30개 이상으로 늘렸다. 단자사 20여개를 한꺼번에 종금사로 전환해준 것으로 삼성 쌍용 등이 이 과정에서 종금사 진출을 추진했다. 영종도 신공항건설사업이 발주됐고, 고속철도 건설업체가 결정되기도 했다. 이밖에 크고 작은 건설공사에 소산 마피아의 부분적인 개입사실도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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