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이후 기업마다 앞다퉈 도입하지만 ‘능력발휘 극대화’ 취지는 간데 없고 정리해고 소용돌이에 통제수단으로 변질/협상은 없다. 정해놓은 계약서에 서명뿐 “내가 왜 이것밖에” 하다가도 가족 생각에…지난달 어느날 아침 A그룹 계열사 김부장 책상의 전화가 울렸다. 『아,김부장? 사인하러 오세요』
잔뜩 긴장한채 임원실에 들어간 김부장. 그러나 자신의 연봉 계약서에 서명하고 나오기까지는 불과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얼마를 받고 싶냐』는 질문은 아니더라도 『작년 실적이 ○○하니 고과등급은 △,그래서 연봉은 □』라는 정도의 배경설명은 기대했다. 하지만 정작 듣게된 이야기는 『여기에 사인하면 됩니다』가 전부. 자신의 「몸값」이 정해지는 순간은 이렇게 짧았다.
이 회사는 올해 처음 연봉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연봉계약서에 서명한 이 회사 차장이상 간부들은 모두 기분이 엉망이었다. 연봉이 불과 몇초만에 결정된 것도 허탈했지만 무엇보다도 대부분 연봉이 작년보다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작년 인사고과가 평균 B(우수)였던 김부장의 경우 원래 연봉이 20% 이상 오르는게 정상이지만 오히려 10% 정도 깎였다.
최근 각 기업마다 연봉제가 새로운 임금체계로 번져가고 있다. 모든 경제주체에게 「구체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국제통화기금(IMF)체제의 예외없는 원칙. 생존의 몸부림이 한창인 기업이 기존 임금체계를 되짚어 보는 일 역시 당연한 작업에 해당한다. 효율성과 경쟁력은 이 시대의 생존을 위한 최상위개념. 기업이 연공서열과 기계적인 인사고과에 따른 전통형 임금체계를 「구조조정」해 보자는 발상 역시 있을 법 하다.
연봉제는 연공서열과 관계없이 개인의 능력과 업적에 따라 차등 보상해주는 임금체계. 능력있는 인재를 발굴하고 근로자들의 생산성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인센티브 제도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문제는 제도보다는 「현장」이다. 서구식 연봉제가 우리 직장문화에 맞지 않는다는 근본적인 문제점은 다음이다. 비용절감, 정리해고 바람의 와중에 연봉제가 실질적 임금삭감의 효과적 방법으로, 사원통제의 유효수단으로 등장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연봉제가 도입된 회사직원들은 대부분이 『내가 왜 이것밖에?』라고 따져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러나 이들은 요즘같은 시기에 섣불리 나섰다간 정리해고 1순위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꾹 눌러 참는다고 고백한다. 『그만큼이라도 받는게 어디냐』는 주변의 이야기도 봉급삭감의 울분을 어느덧 무감각하게 만들어버린다.
30대그룹중 이미 연봉제를 도입했거나 올해중 실시할 계획인 그룹은 23개. 특히 IMF한파 이후 기업마다 연봉제를 앞다퉈 도입하고 있다. 이들 기업은 『서구식 연봉제가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많지만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일한 만큼 대우해주는 임금 및 인사체계의 구축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연봉제를 도입하면서 임금차등지급의 기준을 나름대로 만들어 놓고도 이를 제대로 지키는 흔적은 별로 없어 보인다. 연봉제는 기업마다 차이가 있지만 통상 A(최상)에서 E(최하)까지의 5단계 인사고과 결과를 토대로 A는 30%이상 인상, C는 동결, E는 10%정도 삭감 등의 기준을 적용한다. 중간등급인 C가 전체인원의 50%, A와 B가 30%이상인게 보통이다.
공인노무사 구건서씨는 『작년말이후 연봉이 터무니없이 깎이거나 아무런 이유없이 재계약을 거부당했다는 상담이 부쩍 늘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최저임금 이상만 유지하면 연봉을 아무리 낮춰도 법적으로 문제는 없다. 그러나 당사자들 가운데 연봉제가 개인의 능력발휘를 극대화한다는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 있다는데 대해 이의를 다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최근 연봉계약을 한 모 전자업체의 과장은 『월평균 수령액이 50만원씩 깎였다』며 『각종 휴가비와 연월차수당 등이 사실상 사라진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금액이 삭감된 셈』이라고 털어놓았다. 금융기관인 H사 과장도 『중간등급인 C를 받고 연봉이 4%정도 깎였다』며 『회사 전체적으로 연봉제 도입후 4∼6%의 인건비절감 효과가 생겼다더라』고 전했다. 재계 관계자는 『올해 연봉제를 도입한 S그룹의 경우 작년보다 연봉이 오른 직원들이 3∼5%에 불과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연봉 계약자들은 평균 10∼20%씩 임금을 삭감당하고도 「벙어리 냉가슴」만 앓고 있다』고 말했다.
연봉제는 직원의 업무능력을 당사자와 회사가 동시에 평가해 일치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 협상하는 쌍방향 제도로 운용되는게 원칙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연봉제에는 협상은 없고 서명만 있다. 매년 연봉협상 줄다리기를 하는 프로야구선수의 「스토브 리그」를 떠올리는 것은 오산이다. D그룹 관계자는 『회사가 제시한 연봉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거의 없지만 이같은 「반란」도 2∼3일내에 당초 계약서에 서명하는 것으로 「진압」되기 마련』이라며 『윗사람 눈밖에 나는 것 말고는 남는게 없다』고 말했다.
일부 기업에서는 불황기에 인건비와 노사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합리적인 직능평가시스템을 갖춰놓지도 않은채 서둘러 연봉제를 도입, 오히려 근로자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역효과를 낳고 있다. H그룹 관계자는 『지금까지 돌아가면서 A를 주는 배분식 고과가 많았는데 예고도 없이 작년 기준으로 연봉제를 도입하는게 말이 되느냐』고 말했다.
노동경제연구원 안희탁 박사는 『외국의 경우 객관적인 직무평가제도가 잘 마련돼있어 서로 오해와 갈등의 소지가 적다』며 『충분한 시간을 두고 합의단계를 거쳐 공정한 평가체제를 갖추는게 연봉제의 전제조건』이라고 강조했다.
물론 일부 그룹에서는 연봉제를 도입하면서 1년의 예고기간을 두거나 2개월에 한번씩 면담을 통해 인사고과를 확정짓는 등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아남그룹은 도입 첫해인 올해에는 작년 연봉에 준해 계약을 맺고 내년부터 실적에 따라 본격적인 연봉제를 도입키로 했고, SK그룹은 올해 연봉이 작년보다 깎이는 사람은 나오지 않도록 했다. 3년전 연봉제를 도입한 두산그룹측은 근무분위기가 쇄신됐다는 자체평가를 내리고 있다.
흔히 선진형 임금체계로 인식되는 연봉제. 비단 IMF사태가 아니더라도 수용할 만한 제도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경제난의 한복판에서 도입되는 연봉제는 또 하나의 IMF형 문제로 떠오를 뿐이다.<남대희 기자>남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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