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高麗)말의 요승(妖僧)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는 신돈(辛旽)과 조선초 고승(高僧)으로 이름높은 무학(無學) 대사는 사실상 동시대의 인물이다. 두 사람은 고려왕조가 쇠(衰)하고 조선왕조가 흥(興)하는 시기인 14세기 중반을 함께 살았다. 신돈은 고려의 국력을 탕진시킨 장본인 중의 한 명으로 기록되고 있는 반면 무학은 조선건국의 일등공신으로 역사는 전하고 있다.■신돈(?∼1371년)은 본명이 편조(遍照)로서 여말(麗末) 공민왕(恭愍王)에게 기용되어 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과감한 개혁정책을 펼쳐 백성들의 우러름을 받았다. 그후 전횡을 일삼아 국정을 혼미에 빠뜨리고 끝내 왕의 시해(弑害)에 가담했다가 발각되어 죽음을 당한다. 반면 무학(1327∼1405)은 이성계의 스승으로 그를 도와 조선건국에 참여했으며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등 국사(國師)로서 명망이 높았다.
■동시대에 살면서 모두 나라일에 참여했는데 신돈과 무학에 대한 평가는 왜 이렇게 다른가. 신돈은 애초부터 요승의 기질을 타고 났고 무학은 국사가 될 자질을 타고 났기 때문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돈은 망해가는 고려를 위해, 무학은 일어나는 조선을 위해 일한 차이가 두 사람에 대한 평가를 달리하는 기준이 되지는 않았을까. 가설이지만 신돈이 조금 늦게 태어나 이성계를 위해 일했다면 과연 요승이 되었을까. 또 무학이 공민왕에게 기용되었다면 어떻게 역사에 기록되었을까.
■환란(換亂)의 원인을 규명하느라 지금 온나라가 시끄럽다. 전직 대통령의 검찰 답변서를 놓고 정치권이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가 하면 전직 고위경제관료에 대한 사법처리가 불가피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도 쇠퇴하는 정권, 상상못했던 외환 대란속에서 일한 죄밖에 없다고 주장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신돈과 무학의 차이에는 시대상황의 차이도 컸다고 말한다면 너무 터무니 없는 가설일까.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