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훈(鄭明勳)씨가 지난달 말 KBS교향악단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직의 사의를 표명한 후 KBS는 정씨를 만류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나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한국이 배출한 세계적 음악가의 지휘로 좋은 음악을 들으려던 음악팬들에게는 매우 실망스런 일이다.문제의 발단은 정씨가 부지휘자로 추천한 이탈리아 지휘자 주세페 메가의 영입 좌절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배경에는 또한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속의 경제난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 착잡한 심정으로 「어려운 시대의 문화」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정씨는 지난 1월부터 2000년 말까지 3년간 KBS교향악단 상임직을 맡기로 지난해 9월 계약했다. 연간 10주 체류, 10회 지휘에 30만달러(약 4억원)의 개런티를 받는 조건이었다. 정씨가 지난 2월 지휘한 정기연주회는 『KBS교향악단이 종전과는 다른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호평을 받았으나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단원들에게 추가연습을 요구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정씨는 추가연습을 지휘할 부지휘자로 메가를 추천했으나 달러환율이 높아져 고통을 겪게 된 KBS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정씨의 개런티도 원화기준으로 조정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분명하지 않은 계약에도 문제가 있었다. 음악감독인 정씨는 부지휘자 선임권은 당연히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고 KBS는 그 점을 명시하지 않은 이상 어려운 경제사정이 고려돼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지난달 KBS교향악단을 지휘할 예정이었던 메가도 『부지휘자 자격이 아니면 지휘를 할 수 없다』고 주장함에 따라 그 지휘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졌다.
이번 사태에 대한 음악계의 반응은 국내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4개월만에 사퇴를 발표한 정씨가 무책임하다고 비난하는 쪽과 공영방송인 KBS가 국제적으로 내세울 만한 교향악단을 키우려면 그정도의 투자는 해야 한다는 쪽으로 나뉘고 있다. KBS는 지난해 1조원 예산에 500억원 흑자를 냈는데 IMF체제를 이유로 무조건 음악가의 개런티를 줄이겠다는 발상은 반문화적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광복으로 새 국가를 세운 지도 반세기가 흘렀고 우리가 배출한 우수한 음악인들이 세계 도처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세계에 배출한 인재들을 끌어안으면서 자랑할만한 교향악단을 가질 때가 되었다. KBS는 불과 8개월전 어렵게 영입한 정씨를 의견 차이로 떠나 보내서는 안된다. KBS는 교향악단의 수준을 높이려는 정씨의 요구에 타당한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동안 수없이 지적돼온 방만한 구조를 조정한다면 교향악단에 대한 그 정도의 투자는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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