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나라가 부끄럽다. 가뜩이나 창피해서 고개를 숙인 나라가 더 고개를 들 수 없다.김영삼 전 대통령과 임창렬 전 경제부총리 사이의 환란(換亂)책임 공방은 진실의 소재와는 상관없이 온 국민을 낯뜨겁게 한다. 임씨가 부총리로 취임할 때 국제통화기금(IMF)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느냐 모르고 있었느냐는 것은 환란 원인 규명의 열쇠도 아니고 환란 탈출의 돌파구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 공방이 시끄러운 것은 볼썽 사납다.
게다가 국민들의 환멸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 나라의 전직 대통령과 전직 경제행정의 총수 두사람중 어느쪽이든 한사람이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그동안 거짓말하는 사람들이 최고위통치권에서 다스리는 나라의 국민이었던가. 우리는 통치자들로부터 속아만 온 것이 아닌가. 우리가 속은 것이 또 무엇 무엇이었을까. 어떻게 이런 분들이 이런 때 거짓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사사로운 자기 개인 일도 아닌 나라 일을 가지고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는 이 때에 거짓말로 책임을 전가하겠다는 사람들이 어찌 대통령이었거나 경제부총리였단 말인가.
환란이 우연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이런 비양심으로 다스려진 나라가 무슨 난이든 난을 안만난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심한 것은 대통령과 경제부총리의 군신(君臣)관계다. 아무리 현직을 떠났기로서니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현직때의 일이라면 군신간의 관계가 끊긴 것이 아니다. 아무리 민주주의시대이기로서니 정말 상하간의 신의가 이래도 괜찮은 것인가.
군신유의(君臣有義).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리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제일의(第一義)다. 삼강오륜을 케케묵었다고 비웃는가. 그렇다면 새로운 시대의 풋풋한 강조(綱條)는 상하무의(上下無義)라야 하는가.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틀어 정사(政事)에 대한 요목(要目)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군군신신(君君臣臣)」으로 요약될 수 있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 임금은 임금노릇을 해야하고 신하는 신하노릇을 해야 한다. 임금은 임금의 도리를 다해야 하고 신하는 신하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 이것이 각자 자기 이름에 값해야 한다는 공자의 정명론(正名論)이요 지금도 어떤 지위든 그 신분의 본분을 지켜야 한다는 이 정명사상의 뜻은 유효하고 유용하다.
공자의 제자인 자하(子夏)는 이런 말을 했다.
『춘추(春秋)란 책은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일을 적어놓은 것이다.』
「춘추」는 공자가 쓴 역사서다. 역사란 「군군신신」에 어긋나는 일들의 기록이라는 말이다. 역사는 임금답지 못한 임금, 신하답지 못한 신하를 준엄히 심판한다는 뜻이다.
지금 전직 대통령과 전직 경제부총리의 공방은 과연 「군신유의」 「군군신신」의 대의를 지키고 있는가.
임금은 신하를 예(禮)로 부려야 하고 신하는 임금을 충(忠)으로 섬겨야 한다는 것이 「논어」의 가르침이다. 지금 고루(高樓)에서의 티격태격이 예요 충인가.
진실도 중요하지만 신의도 중요하다. 신의가 무너지면 진실도 무너지기 쉽다.
의(義)에는 두가지 신의(信義)가 없다(義無二信). 이 사람에게는 이 신의,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신의가 없는 법이다. 또 신의에는 두가지 명령이 없다(信無二命). 신의를 지키는 사람은 두가지 명령을 받들지 않는 법이다.
초(楚)나라 장왕(莊王)이 한 말이 있다. 『내 듣자하니 한 임금이 매우 현명하면서 곁에 스승될만한 보필이 있으면 가히 왕자(王者)가 될 수 있고 임금이 중간정도의 지혜를 가지고 있으면서 곁에 스승이 있으면 패자(覇者)가 될 수 있으나 임금도 못났고 군신(群臣)조차 그 임금만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다. 지금 나는 못난 임금, 그런데 나의 여러 신하조차 나만 못하니 나라가 망할까 두렵다.』
이 탄식소리가 곁에서 들리는 것 같다.
군신관계가 무너지는 것은 사회의 모든 신의관계가 무너지는 것이다. 나라의 통치권에 신(信)과 의(義)가 없으면 어느 국민이 신과 의를 본받겠는가. 이런 사회적 환난(患難)이 어찌 경제적 환란(換亂)보다 덜 국가적 재난이겠는가.<본사 논설고문>본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