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軍개혁의 막전막후:9(문민정부 5년:21)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軍개혁의 막전막후:9(문민정부 5년:21)

입력
1998.05.04 00:00
0 0

◎“노소영에 뇌물” 이양호 국방 추락/“총장진급위해 다이아 로비·장관땐 대우서 거액수뢰” 國監폭로/“일개 무기중개상에 놀아나며 파렴치 행위” 수사 8일만에 구속/권영해씨 도움 공군 첫 합참의장·장관 수직상승 일순간 곤두박질96년 10월18일 오후, 국회 국방위 국정감사가 열리고 있는 국방부 대회의실. 국민회의 정동영(鄭東泳) 의원이 이날 오전 이양호(李養鎬) 전 장관으로 부터 국방장관직을 물려받은 김동진(金東鎭) 장관을 향해 질문을 시작했다. 이날 국방위 국감장은 평소와는 달리 국방부 출입기자들 뿐 아니라 국방위 담당기자들까지 대거 몰려와 발디딜 틈조차 없었다. 이날 정의원이 국감장에서「무언가를 터뜨린다」는 설이 오전부터 나돌았었기 때문이다.

『이양호 전 장관이 92년 합참 정보본부장시절 공참총장으로 진급하기위해 무기중개상인 권병호(權炳浩)씨를 통해 당시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의 딸 노소영(盧素英)씨에게 수천만원대의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반지등을 건네주는등 진급로비를 벌였습니다.(정의원은 목걸이등의 사진및 이양호씨가 자신이 총장이 돼야하는 이유를 자필로 적은 메모지 사본을 제시했다) 또 이 전장관이 국방장관 재직시인 95년 4월5일 공군이 추진중이던 경전투헬기(KLH)사업과 관련, 타워호텔에서 권병호씨를 통해 대우중공업으로부터 1억5,000만원을 뇌물로 받았습니다』

이날 폭로는 이양호 전 장관이 전격경질된 17일 그가 국민회의 대변인자격으로 『이양호 전 장관이 94년 합참의장 재직시 미 무기중개상인 권병호씨에게 공군의 기밀사항인 정밀장비 구매계획을 영문메모로 건네주었다』고 터뜨린 1차폭로의 속편이었다. 문민정부들어 합참의장, 국방장관등으로 수직상승했던 파일럿출신 이양호 전장관이 만신창이가 되어 추락하는 순간이었다. 정의원의 폭로가 터지자 당시 정가에서는 폭로배경에 대해 여러설이 분분했다.

당시 폭로주역을 맡았던 정동영의원의 말. 『96년 하반기는 그해 9월18일 발생한 강릉무장공비 침투사건에 이어 국감과정에서 언론에 보도된 두어가지 군사비밀 사항의 출처를 문제삼아 우리당의원 보좌관들에 대해 검찰과 기무사가 수사에 나서는등 야당이 어려운 처지였습니다. 게다가 그해 4·11 총선직전 판문점에서 북한측이 무력시위를 벌인 「북풍사건」으로 야당이 총선에서 참패하는등 한마디로 「안보정국」이 지배하던 때였습니다. 이때 현 국방장관인 우리당 천용택(千容宅) 의원에게 이양호 전장관에 대한 비리파일이 입수됐습니다. 우리로서는 보좌관들에 대한 수사를 견제할 수 있는 호기로 보고 국감에서 폭로하기로 했지요. 다만 천의원이 「이장관과는 30년 친구」라며 양보하는 바람에 제가 대신 총대를 맸지요. 그런데 당시 같은 국방위원이었던 권노갑(權魯甲) 전 의원이 외부에서 전화로 우리와 폭로시기를 협의하는 과정에서 정보기관에 도청되는 바람에 정부가 폭로 전날인 17일 오후 1시에 허겁지겁 장관을 경질해버린 것으로 압니다. 이장관은 당시 국감기간이었는데다 12월로 예정된 한미연례안보협의회를 앞두고 있어 교체할 시점이 아니었거든요』

정의원의 폭로가 있자 이전장관은 이날 밤 국방부 출입기자들을 하얏트호텔 일식집으로 불러 『권씨는 국제사기꾼이다. 소영씨에게 건네줬다는 반지등은 권씨가 자기 부인것을 찍은 것으로 그간 나에게 이를 미끼로 수차례나 공갈을 해왔다. 권씨가 대우로부터 3억원을 받아 나에게 1억5,000만원을 전해줬다는 돈얘기도 그가 몽땅 가로채 놓고 거짓말한 것』이라고 폭로내용을 모두 부인했다.

그러나 이같은 이씨의 변명은 이날 오후부터 급거 수사에 착수한 검찰에 의해 며칠도 안돼 전부 「임기응변식 거짓말」이었음이 드러난다.

수사에는 곡절도 많았다. 수사를 맡았던 당시 대검중수부 박상길(朴相吉) 수사2과장(현 서울지검 특수2부장)의 말. 『청와대의 지시로 수사에 나섰지만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새정부들어 율곡비리와 진급비리사건 등으로 여러명의 전현직 군총수를 검찰이 처벌하는 과정에서 군과 검찰사이에 미묘한 긴장관계가 형성됐던 시점인데다 자체조사한 기무사가 청와대에 「사실이 아니다」라고 보고했기 때문이었지요. 만약 혐의를 못밝혀내면 큰일난다는 비장한 각오로 임했지요. 다행히 이씨집에 대한 압수수색을 통해 3억여원짜리 채권을 발견하고 그해 식목일날 타워호텔 일식당에 권병호가 사인한 영수증을 확보하면서 수사가 급진전했습니다. 이어 당시 운전병을 불러 조사한 결과 이씨의 회유에 의해 운전병이 「식목일날 타워호텔에 가지않았다」는 허위 기자회견을 가진 점을 확인하고 곧 이씨를 소환했습니다. 완강히 혐의사실을 부인하던 이씨는 「채권구입 시기가 수뢰직후인 점」과 「호텔영수증및 운전병의 진술」을 들이대며 「장군의 양심을 지키라」고 설득하자 하루만에 혐의사실을 자백했습니다』

이씨는 정동영의원의 첫 폭로가 나온지 8일만인 10월26일 결국 대우로부터 1억5,000만원을 뇌물로 받은 사실과 권병호씨에게 공군장비 도입계획을 누설한 혐의등으로 구속돼 징역4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4개월만인 지난해 12월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이씨의 비리는 위에서부터 아래까지의 완전한 군개혁이 얼마나 험하고 힘든 일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진급비리와 율곡비리등 굵직굵직한 파동을 헤치며 합참의장에서 국방장관으로까지 탄탄대로를 달렸던 문민군개혁의 기수마저 일개 무기중개상에 놀아나며 파렴치행위를 저질렀으니….

이씨는 문민군부에서 실세는 아니었지만 YS의 총애를 받으며 군 최고위직까지 오르는 등 관운에 관한한 타고 난 장군이었다. 사실 이씨가 공군참모총장에 오른 것도 「노소영씨를 통한 로비」의 약효여부를 떠나 관운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이씨가 공참총장직에 오른 92년9월께 국방부고위직을 맡았던 예비역L장군의 증언.

『당시 합참 정보본부장이던 이씨의 경합자는 공사9기로 1기 후배인 조근해(趙根海) 공군작전사령관이었는데 두사람은 경력상 막상막하였습니다. 이씨는 합리적이고도 온화한 성품으로 상하간에 신망이 높았고 조씨는 리더십과 업무장악력이 뛰어났지요. 그런데 이씨의 손을 들어준 사람은 이종구(李鍾九) 당시 국방장관이었습니다. 이장관은 8.18사업이라는 군구조를 통합군으로 개편하는 작업에 관심이 많던 때라 각군 총장은 야전출신보다 합참근무를 해본 장군이 맡아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있었습니다. 게다가 장관을 비롯 육군·해군참모총장이 모두 영남출신이어서 TK인 조장군마저 총장이 되면 군수뇌부 모두를 영남이 독식한다는 비난도 예상됐습니다. 이씨가 충북출신인 점도 득이 됐지요. 또한 조장군은 다음 기회에 총장을 해도 늦지않다는 계산도 있었고요』

문민정부 들어서도 행운의 여신은 이씨를 떠나지 않았다. 이씨는 93년 5월24일 단행된 「12.12쿠데타 관련 숙군인사」로 옷을 벗은 이필섭(李弼燮) 의장의 후임으로 공군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합참의장에 올랐다. 이씨의 의장승진에는 권영해(權寧海) 당시 국방장관의 힘이 컸다는게 중론. 당시 국방부 차관보직에 있었던 예비역 P장군의 말이다.

『권영해 전장관의 차관시절에 합참 정보본부장직에 있던 이씨는 보통 차관을 우습게 알던 일반 3성장군과는 달리 권차관에게 깍듯하게 대해 후한 점수를 땄습니다. 마침 하나회 장성들을 정리하는 바람에 육군에 고참대장이 없어 인선에 애를 먹던중 이씨가 대안으로 떠오른 거지요. 마찬가지로 94년말의 개각에서도 역시 이날 안기부장에 임명된 권영해씨가 밀어 장관으로까지 올라간 것으로 압니다. 역시 육사 16∼17기 출신중에 마땅한 인물이 없던데다 이씨의 청렴성과 원만한 성격등이 감안됐지요』

그러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고 했던가. 하늘높은 줄 모르고 고속상승하던 이씨는 결국 공참총장이 되기위해 벌였던 「로비의 덫」에 걸려 일순간에 추락하고 말았다.<윤승용·유성식 기자>

◎李씨는 육군의 희생양이었나/고위장성 인사놓고 갈등/육군 실세그룹과 不和說/측근장성 함께 옷벗어

이양호 전 국방장관의 비리사건이 터져나오자 당시 국방부 주변에서는 육군 실세그룹에의해 공군출신 이씨가 「희생양」이 됐다는 설이 나돌았다. 소문의 골자는 비록 야당측의 폭로가 발단이 되긴 했으나, 육군 실세그룹이 5·6공시절부터 육군 고위장성들과 친분관계가 돈독했던 권병호씨를 부추겨 비리를 터뜨리도록 했다는 것.

이양호씨가 장관재직시 국방부 측근 참모였던 예비역 Y장군의 증언.

『이씨가 권영해씨등의 후원을 업고 합참의장과 국방장관에까지 올랐지만 육군 고위장성의 인사를 놓고 차츰 권영해 당시 안기부장, 김동진 당시 합참의장, 윤용남 당시 육참총장등과 알력이 심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장관취임 3개월만에 단행한 대장진급인사에서 김동진의장등이 밀던 김형선(金炯璇) 참모차장이 탈락하고 오영우(吳榮祐) 교육사령관과 조성태(趙成台) 국방부 정책실장이 각각 1·2군사령관으로 나갔습니다. 김의장이 노발대발했으나 대통령에 대한 대장승진 제청권을 장관이 갖고있는 군인사법때문에 분을 삭여야했지요』

역시 또다른 예비역 K장군의 증언.

『권안기부장과는 처음에 좋은 사이였으나 권부장의 인사청탁을 이씨가 몇차례 비토를 놓으면서 틀어졌고, 윤총장과는 원래부터 그리 원만하지 못했다가 역시 육군장성 인사를 놓고 수차례 대립하면서 반목이 심화됐습니다. 특히 이씨가 경질되던날 단행된 96년10월 대장승진 인사때 불화가 최고조에 달했지요. 이씨는 합참의장에 청주고후배인 장성(張城)연합사부사령관, 육참총장에 천안출신인 조성태 2군사령관이나 전북출신인 오영우 1군사령관을 앉히려했지요. 적절한 지역안배를 꾀했던 거지요. 그러나 이를 눈치챈 김현철(金賢哲)씨와 권영해 안기부장, 전역위기에 몰린 윤용남총장등의 반격에 결국 밀렸습니다. 이씨는 하나회숙정의 공백기에 군개혁의 기수로 나섰다가 말년에 용도폐기, 다시말해 「토사구팽(兎死狗烹)」된 겁니다』

이씨가 경질되기 4시간 전에 발표된 군인사는 합참의장에 윤용남육참총장, 육참총장에 도일규(都日圭) 3군사령관등이 영전하고 이씨가 밀던 장군들은 모두 전역하는 내용이었다.

YS의 「신한국호」에 함께 올라탄 신실세들이었지만 이처럼 각자가 「동상이몽(同床異夢)」인채 정권말기까지 암투를 벌였던 것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