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軍 개혁의 막전막후:8(문민정부 5년:20)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軍 개혁의 막전막후:8(문민정부 5년:20)

입력
1998.05.02 00:00
0 0

◎肅軍명분 먹칠한 ‘하나회 장관’/YS, 고교후배 이병태씨 지역연고 얽매여 파격 발탁/국회답변중 땀밴 양말 내보이는 등 奇行·돌출언행 계속/‘신도시 장애물’ 발언파문·총기난사사건으로 불명예 퇴진93년 12월22일 국방부청사 2층 제1회의실. 이병태(李炳台) 신임 국방장관과의 상견례를 위해 모인 합참의장과 각군 총장, 국방부 직할부대장등 100여명은 회의실 한 가운데 칠판이 놓여있자 영문을 몰라 수군거렸다. 이어 들어온 이장관은 바로 칠판으로 다가가 「베시(VESSY)」「마이어(MEYERES)」 등 영문이름과 그래프를 그렸다.

『미군도 베시 전합참의장과 마이어 전육참총장이 웨스트 포인트(미국 육사)선후배사이지만 진급순서가 여러차례 뒤바뀐 바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기수(期數)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군선배인 이양호(李養鎬) 합참의장이나 육사동기생인 김동진(金東鎭) 육참총장이 나 때문에 물러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본인들의 거취문제가 공개석상에서, 그것도 신임장관의 일성으로 거론되자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앉아있던 이의장과 김총장의 표정이 일순 머쓱해졌다. 이장관은 곧이어 미리 준비한 메모를 꺼내 전례없는 지시를 내렸다. 『사령부별로 계급과 관계없이 「현자(賢者)」를 10명씩 모아 합숙을 통해 그동안 개혁작업 성과와 향후 추진과제를 토론해 결과를 보고해 주십시오. 성탄절 휴가도 반납하십시오』 그는 또 「상식에 근거한 질문 몇가지」라고 칠판에 적은 뒤 국방부 현안에 관해 참석자들과 청문회를 방불케 하는 문답을 가졌다. 그것도 시종 반말투로.

문민정부의 두번째 국방장관으로 권영해(權寧海) 전장관의 바통을 이어받은 이장관은 취임 첫날부터 이렇듯 독특한 개성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그리고 94년 12월 경질될 때까지의 1년간을 시종 파격과 기행, 돌출발언으로 장식했다.

사실 그의 장관발탁부터가 파격이었다. 이씨가 문민정부 군개혁의 표적이었던 하나회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개각에 앞서 후임 장관에 대한 무수한 하마평이 나돌았지만, 당시 보훈처장이던 이씨의 입각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막상 뚜껑이 열리자 군관계자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나회를 범죄집단 취급할 때는 언제고…』

그런 만큼 개각직후 국방부주변에선 이씨의 입각이 갖는 의미를 헤아리는 갖가지 얘기들이 오갔다. 하나회숙정이 끝났음을 알리는 증표라는 얘기가 가장 많았고, 하나회와 비하나회의 갈등조정을 위한 고도의 포석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재임기간중 군정책 기조가 권전장관 시절과 달라진 것은 거의 없었다. 하나회 인사들은 영관급까지 계속 한직으로 밀리거나 옷을 벗었고 하나회와 비하나회간 반목도 여전했다. 자연 이씨의 발탁은 「YS정권의 무원칙한 군개혁의 표본」으로 평가절하됐다.

『이장관의 등장은 문민정부의 군개혁을 조소(嘲笑)거리로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그전까지 숙군(肅軍)에는 나름의 명분과 일관성이 있었지만 이씨가 장관에 임명됨으로써 이것이 일거에 무너졌습니다. 이장관의 기용이야말로 YS가 정교한 군개혁 프로그램이나 철학없이 일을 벌렸다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하나회출신 예비역 중장 A씨의 말이다.

그렇다면 YS는 왜 이런 「무리수」를 두었을까. 그 배경은 평소 YS와 이씨의 「특수관계」에서 유추할수 있다. 이씨는 군인맥이 취약했던 YS의 상도동캠프에 비교적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다. 신한국당 고위당직자를 지낸 S(현 한나라당의원)씨는 『92년 YS가 민자당 대통령후보가 된 후 상도동에서 「이병태 하와이 총영사와 김광석(金光石) 육군대학총장은 우리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고 전했다.

YS와 이씨는 오래전부터 거물 정치인과 장성으로서 경남고동문 모임 등을 통해 꾸준히 교분을 쌓아온 것으로 전해진다. P(한나라당 의원)씨가 소개하는 일화 한토막. 『YS가 민자당대표로 재임하던 92년초로 기억됩니다. YS와 경남고출신 관료, 기업가 등이 한식집에서 모임을 갖고 있었는데 갑자기 귀에 익은 노래가 들려왔어요. 여종업원들이 경남고 교가를 부르고 있던 거예요. 동문들도 학창시절을 떠올리며 하나 둘씩 따라 불렀습니다. 영문을 알아보니 이병태씨가 연습을 시켰다는 겁니다. 이를 들은 YS는 「역시 우리 병태야」라며 흐믓해 했습니다. 평소 YS는 이씨의 단순·명쾌한 성격과 앞뒤 가리지 않는 충성심을 높이 샀습니다』

이장관은 또 하와이 총영사시절에는 미국 애스핀 국방장관의 국방외교전략을 70여쪽으로 요약해 상도동에 보내는 등 YS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씨는 하나회였지만 하나회출신 동기생 김진영(金振永) 전육참총장과 비하나회인 김동진전국방장관 등에 밀려 대장진급에 실패, 92년 7월 합참작전본부장을 끝으로 전역했던 인물. 그러나 미국 군사영어학교 이수한 그는 탁월한 영어실력을 발휘, 12·12직후에는 당시 전두환(全斗煥) 보안사령관의 밀명으로 미국에 건너가 레이건 행정부에 쿠데타의 진상을 설명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이씨의 업무스타일에는 그의 「돌격대형」 성품이 그대로 반영됐다. 율곡사업에 대한 감사원의 감사가 일단락됐음에도 국방부의 자체 특감방침을 천명했는가 하면 「포탄사기 사건」의 철저규명을 위한 합수부 구성, 7일 합숙팀운영, 국방제도 개선위 발족 등 세간의 관심을 모을 만한 정책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러나 즉흥적이고 여론을 의식한 이들 정책은 군의 업무중복과 시행착오를 야기했을 뿐, 실질적 개혁효과는 거의 거두지못했다는 게 군관계자들의 일반적 평가다. 이 과정에서 이씨는 율곡비리 의혹과 관련, 확인되지 않은 첩보에 의존해 무고한 사람에 대해 출국금지 조치를 취했다가 혐의없음이 밝혀져 뒤늦게 이를 해제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이씨는 국방장관이면서도 하나회출신이었던 까닭에, 권영해 당시 국방장관등 군개혁안을 성안하고 주도한 신실세그룹에는 끼지 못했다. 오직 YS와의 개인적 친분이 그를 지탱한 유일한 배경이었다. 이씨가 내놓은 군정책이 대부분 엉뚱하다는 인상을 준 이유를 이런 관점에서 분석하는 시각도 있다.

정작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것은 「돌출언행」이었다. 그는 94년 1월 국회 국방위에서 답변도중 느닷없이 구두를 벗고 땀이 밴 양말을 가리키며 『긴장속에 동분서주하느라 하루에 세번 양말을 바꿔 신는다』고 말해 구설수를 탔다. 상식을 뛰어넘은 이런 행동은 당시 배석했던 국방부 관계자중 일부가 벌떡 일어설 정도로 주변을 놀라게 했고, 야권은 물론 여권에서도 『저러다가 한번 큰 일을 낼 것』이라는 우려가 나왔다.

같은 해 7월 국회본회의 답변에서 이같은 우려는 급기야 현실로 나타났다. 『새로 개발되는 수도권 신도시 자체를 유사시 장애물로 활용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이 발언에 당황한 국방부는 『전시에는 모든 도시지역을 장애물로 이용하도록 돼 있다는 개념을 말한 것일 뿐』이라고 서둘러 해명했지만 고양, 평촌 등 신도시 주민들은 들끓었고 야권은 국방장관 해임건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사실여부와 별개로 민감한 사안을 여과없이 말해버린 국방장관의 경솔함이었다. 이씨는 빗발치는 경질요구에도 불구, YS의 신임에 힘입어 일단 고비를 넘겼지만 이 실언은 두고두고 그의 퇴진을 재촉하는 악재가 됐고 결국 12월 자신이 사단장을 지낸 26사단 총기난사 사건에 책임을 지고 장관직을 물러났다.

하나회출신 이병태 국방장관의 등장은 원칙을 무시한 지역연고 인사의 대표적 사례로 치부되면서 결과적으로 군개혁을 희화화(戱畵化)하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윤승용·유성식 기자>

◎국방장관 수난사/문민 4명중 3명 도중하차 5·6共 5명도 사법처리/비리·정치오염 ‘씁쓸한 상징’

문민정부 5년동안 모두 네사람이 국방장관직을 거쳐갔지만 이중 세사람이 비리에 연루돼 사법처리되거나 뜻밖의 사고에 책임을 지고 불명예퇴진하는 수난을 겪었다. 별다른 사고없이 장관직을 물러난 사람은 네번째 장관인 김동진(金東鎭) 장관이 유일하다.

초대 장관인 권영해 장관은 율곡비리 연루의혹으로 감사원조사까지 받은 끝에 93년말 터진 포탄도입 사기사건으로 도중하차했고, 뒤를 이은 이병태 장관도 「일산 신도시 방어진지」발언으로 물의를 빚다 94년 11월 26사단 총기난사 사고에 발목을 잡혀 그해 연말 개각에서 경질됐다. 4명의 장관중 재임기간(1년10개월)이 가장 길었던 이양호(李養鎬) 장관은 인사청탁과 수뢰스캔들로 인해 96년 10월 경질 9일만에 전격 구속됐다.

문민정권에서 이들 뿐아니라 5, 6공의 전직 국방장관들도 개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줄줄이 사법처리되는 비운을 맛봐야 했다. 93년 이상훈(李相薰), 이종구(李鍾九) 장관은 율곡비리와 관련, 업계로부터 각각 4억2,000만원, 7억8,000만원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감사원 감사결과 드러나 대검중수부에 구속됐다. 96년에는 이른바 「역사 바로세우기」를 위한 검찰수사에서 주영복(周永福) 정호용(鄭鎬溶) 최세창(崔世昌) 장관이 12·12와 5·18과 관련한 군사반란 혐의로 구속됐다.

국방장관들의 이같은 수난사는 각종 비리와 현실정치에 오염됐던 군의 자화상과 군개혁의 지난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씁쓸한 뒷 맛을 남기고 있다.

□역대 국방장관의 재임기간과 거취

대 이 름 재임기간 비고

25 정호용 87. 7∼88. 2 5·18 연루혐의 구속

26 오자복 88. 2∼88.12

27 이상훈 88.12∼90.10 율곡사업관련 뇌물수수 구속

28 이종구 90.10∼91.12 〃

29 최세창 91.12∼93. 2 12·12연루혐의 구속

30 권영해 93. 2∼93.12 「포탄사기사건」 관련 퇴진

31 이병태 93.12∼94.12 「일산방어진지」발언관련퇴진

32 이양호 94.12∼96.10 뇌물수수혐의 구속

33 김동진 96.10∼98. 2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