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과 禁女벽 허문 ‘원더우먼’/“여자가 어떻게” 만류 뿌리치고 서울대서 첫 지원/20년간 어린이 1만명수술… “워낙바빠 혼자살아요”외과는 의료계의 대표적 3D분야로 꼽히지만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성역」이었다. 보건복지부의 면허등록 의사수는 97년 3월말 현재 6만2,240명. 이 중 여자 외과의사는 50여명(전문의 31명 포함)에 불과하다. 서울대병원 소아외과과장 박귀원(49)교수는 서울대 출신 여자 외과의사 1호, 서울대의대 임상분야의 여교수 1호등 외과분야의 독보적인 맹렬여성이다.
그의 하루는 대부분 수술로 시작해 수술로 끝난다. 야간이나 주말, 공휴일등에 집에서 쉬다가도 응급환자가 들어왔다는 호출이 오면 총알처럼 튀어나간다. 1주일에 보통 15∼20건의 수술을 한다. 서울대병원에서 이뤄지는 어린이환자 수술은 연간 1,300여건. 이 중 700여건이 박교수의 몫이다. 20년동안 1만건 이상의 수술을 했다.
『빨리 낫는 재미로 외과를 택한 것같아요. 어린이는 어른보다 신경이 많이 쓰이고 고되지만 봐주는 만큼 결과도 좋거든요』. 하지만 외과의사가 되기까지는 많은 장애물을 넘어야 했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72년 서울대의대를 졸업하고 전공분야를 선택할 무렵. 외과를 지원했더니 외과학교실이 발칵 뒤집혔다. 당시만 해도 「외과는 남성의 영역」이라는 의식이 뿌리깊었고, 서울대 역사상 여학생이 외과에 지원한 선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선배들은 『끔찍한 수술을 매일 반복하는 격무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며 지겨울 정도로 걱정을 해주었다. 당시는 통행금지가 있을 때여서 수술이 늦어지면 병원 간이침대에서 새우잠을 자야 했다. 어떤 선배는 『남학생들 틈에 끼여 잠을 잘 각오가 돼 있느냐』며 으름장을 놓았다. 외과의 한 교수는 『지금까지 외과에서 여학생을 뽑은 적이 없다. 원한다면 이화여대의대에 추천서를 써주겠다』며 2시간동안 만류했다. 그러나 그는 『받아주지 않으면 미국에 가서라도 외과의사가 되겠다』며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외과전문의로 당시 서울대의대 교수였던 아버지도 『남녀 차별이 심한 우리 사회에서 누가 여자에게 배를 드러내 놓고 수술을 받겠느냐』며 외과지원을 반대했다. 이런 아버지를 한 달동안 설득하고 성적도 문제가 안돼 기어이 일반외과 전문의수련을 시작했다.
그는 당시 졸업생 109명 중 5등으로 졸업했고, 외과 레지던트 지원자 중에선 성적이 가장 좋았다. 함께 졸업한 여학생 5명은 산부인과 소아과 임상병리과등을 지원했다. 당시 외과의사는 「맹장으로 시작해 맹장으로 끝난다」고 할 정도로 맹장수술을 많이 했다. 그가 외과 수련의로서 처음 한 수술도 맹장수술이었다. 『수술을 끝내고 나니 선생님들이 여자도 외과를 할 수 있는거구나 하며 놀라더군요』. 박교수는 국내 소아외과시대의 본격적인 막을 연 주역이다. 서울대병원이 소아외과를 개원한 게 78년 5월로, 올해가 20년이다.
그는 77년 외과전문의를 획득하고 79년부터 줄곧 소아외과에서 근무해왔다. 주전공은 탈장 거대결장등 소화기 계통의 폐색증과 선천성기형 수술. 최근엔 담도가 막혀 간경화가 유발되는 어린이를 치료하기 위해 본격적인 간이식 수술을 추진중이다. 『여자여서 수술을 못한다는 말을 듣기싫어 더욱 열심히 했습니다. 솔직히 오기도 났구요』. 뛰어난 실력과 당찬 행동에 「원더우먼」, 「억순이」라는 별명이 뒤따랐다. 그가 금녀(禁女)의 터부를 깬 후 서울대병원에는 여성후배 6명이 외과에 들어왔다.
그는 96년 11월 전국 여성 외과의사들의 친선모임인 미도회(美刀會)를 결성, 회장을 맡고 있다. 매년 11월 첫째주 대한외과학회 기간중 별도 모임을 갖고 외과의사의 고충을 서로 나누고 격려하며 어려움을 극복하고 있다. 이들의 노력으로 최근엔 매년 10여명의 여학생이 외과를 지원하고 있다.
박교수는 서울대병원 의료봉사단체인 함춘후원회 간사로 불우한 환자를 보살피는데도 앞장서고 있다. 외판사원들이 딱한 사정을 호소하면 물건을 사주고야 마는 여린 심성의 소유자기도 하다.
바쁘게 사느라 혼기를 놓쳐 혼자 살고 있는 그는 『스트레스가 쌓이면 웃어서 해소한다』고 말했다. 주말이나 휴일에도 응급환자 때문에 대기하는 경우가 많아 특별한 취미생활도 없다.
그렇지만 수술받은 어린이가 금세 회복해 환한 웃음으로 반길 때면 외과의사가 되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엔 신경외과 흉부외과등에도 관심을 갖는 후배들이 늘고 있어 흐뭇하다. 그는 『벽을 깨는 여성이 있어야 진정한 남녀평등이 실현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재학 기자>고재학>
◎대물림의사 박귀원 교수 집안/가족 8명중 6명·형부 2명·조카 1명 의사
의사사회는 「직업 대물림」현상이 유달리 심하다. 사회·경제적으로 대접받는 자리이다보니 자연스럽게 부모의 직업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사위, 며느리까지 의사를 들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박귀원교수는 대표적인 의사집안 출신이다.
아버지 박길수(84) 서울대 명예교수는 일본의대를 졸업하고 1942년부터 40여년간 서울대병원 일반외과에 몸담았다. 그는 정년 후에도 을지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다 최근 은퇴했다. 어머니 윤옥자(79)씨는 일본 제국여의전 출신의 산부인과의사. 슬하에 딸 다섯과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딸 넷과 사위 둘, 외손자 1명이 의사다.
큰딸 경자(55)씨는 고려대의대를 졸업하고 산부인과를 개원했다. 큰 사위는 서울대의대를 졸업한 우제홍(55·인하대의대 일반외과)교수. 둘째딸 인자(53)씨는 서울대치대를 졸업하고 소아치과를 운영중이다. 둘째사위 김창회(55)씨는 서울대치대 보철과교수. 김씨부부는 대학 선·후배로 만나 7년간의 열애끝에 결혼한 캠퍼스 커플이었다.
셋째딸 성원(80년 사망)씨는 서울대의대를 졸업하고 소아과전문의를 딴 뒤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중 사고로 숨졌다. 귀원씨는 넷째 딸이다. 원래 법대를 지망했으나 『학비를 대주지 않겠다』는 아버지의 반대로 진로를 바꿨다. 지금은 외과의사가 된 게 너무 행복하단다. 막내딸 희원(43)씨는 미국 워싱턴대 약대를 나와 미국에서 살고 있다.
외아들 환규(47)씨도 집안 분위기 탓에 한양대의대에 들어갔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고 지금은 사업을 하고 있다.
□약력
49년 서울출생
72년 서울대의대 졸
77년 외과전문의 자격취득
77∼79년 원자력병원 의사
80년 서울대의대 전임강사
84∼85년 미 하버드대의대 매사추세 츠종합병원 연구원
현재 대한소아외과학회 회원·서울대병원 소아외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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