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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 대통령의 한국방문:2(한국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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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 대통령의 한국방문:2(한국의 추억)

입력
1998.04.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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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대통령 사상처음 DMZ 방문/全 대통령 안전걱정에 레이건 “낸시에겐 얘기말라” 유머/한 언론 “친절·겸손한 할아버지” 評… ‘全씨와 반대’ 암시한듯/한반도 안보·全 정권 민주정책 강화 되새기는 성과거둬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의 한국 국빈방문 둘째날은 내 아내와 나에게는 첫날보다 더 흥미진진했다. 이날도 분위기는 하루종일 우호적이었다. 사진과 깃발, 각종 장식물 및 수많은 행사로 넘쳐났다. 레이건 대통령은 할아버지뻘 나이였지만 업무에 있어서는 주된 관심사, 성실함, 그리고 이에대한 확고한 입장을 놀랄만큼의 생기있는 자세로 전달했다. 북한이 위협적으로 사용하던 공산주의식 행동과 수사(修辭)와는 판이했다. 그런 위협은 냉전시대의 위기상황에서는 뚜렷이 감지됐다.

조지 슐츠 국무장관과 몇몇 각료가 포함된 공식 수행단에는 외교정책에 탁월한 식견을 갖고 있는 두사람의 전문가가 있었다. 한국민에도 잘 알려진 인물이었는데, 차례로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를 지냈던 개스턴 시거 와 폴 월포비츠였다. 둘다 친한 친구들이었다. 전체 수행단은 레이건 대통령이 제기한 여러 문제를 접근하는데 사기가 매우 고양돼 있었고, 또 긍정적이었다.

내 대사관저에서 아침식사를 한뒤 우리는 용산 헬리콥터 발착장으로 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일본 오키나와(沖繩)에서 온 대형 해군 헬기 2대를 타고 비무장지대(DMZ)로 날아갔다.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레이건 대통령과 수행단 모두는 미 제2사단 병사들과 함께 「자유의 종(Liberty Bell)」 캠프의 예배에 참석했다. 그때 대통령은 한껏 고양된 미 병사들에게 연설한뒤 수행단과 함께 점심 배식줄에 섰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대통령과 함께 비무장지대안에 있는 전초기지로 갔다. 그곳에서는 영화속 무대장치같은 모습을 한, 인위적으로 조성된 판문점 마을을 비롯, 북한군과 각종 시설들이 한눈에 또렷이 들어왔다. 북한군과 이렇게까지 근접한 곳에 오려고 시도했던 미 대통령은 일찍이 없었다. 후에 헐뜯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를 두고 레이건 대통령이 갖고 있는 「카우보이같은 영화배우 기질」일뿐이라고 꼬집었지만, 함께 있었던 우리들 모두는 그가 미국의 정책에 얼마나 강한 신뢰감을 갖고 있었고, 또 그 중 한 역할을 하게 되기를 얼마나 바랐던가를 느낄수 있었다.

비무장지대를 방문한 수행단처럼 레이건 대통령도 푸른색의 야전점퍼로 갈아입었다. 레이건 대통령이 전초기지의 병사들에게 『지금처럼 내가 자랑스러울때는 없었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의 진실됨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취재진들은 레이건 대통령을 「위대한 전달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날 83년 11월13일, 나는 그 별칭이 정확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뿐 아니라 레이건 대통령이 재선에도 성공하리라는 것을 굳게 믿게 됐다.

캠프를 떠나 우리는 헬기로 한국군 제1사단 본부로 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국방장관을 비롯한 한국군 수뇌부들로부터 환대받았다. 레이건 대통령은 (우리도 마찬가지였지만) 한국군 병사들이 펼쳐보인 태권도 시범을 보고 완전히 매료됐다. 그들은 맨손으로 벽돌과 나무판을 격파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우리 수행단과 한국 국방을 책임지는 군요원들간에 유대감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수 있었다.

오후 2시30분이 막 지난 시간, 우리는 헬기로 금방 한미연합사령부 본부에 도착했다. 여기서 우리는 서울의 중심부가 북한의 군사위협으로부터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를 상기할수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이 국회에서 연설할 때 분명히 언급했던 그런 것이었다. 그 다음 레이건 대통령은 시간을 내 우리 대사관저 본부에서 전달된 여러 업무를 챙겼다.

오후 6시에서 7시30분까지 우리는 다시 청와대에서 언론매체와 청와대 공보담당자들이 말하는 「2차 정상회담」을 가졌다. 엄격히 통제된 이 회담에서 양측은 무역과 경제투자환경, 중국과의 관계정상화를 희망하는 한국측 입장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지만, 특이하거나 별다른 결론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우리 대사관 참모진들과 한국측 인사들은 방문을 결산하기 위한 합동선언문 초안을 이미 작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분명히 긍정적인 결과물이 있었다. 한국의 안보에 대한 미국민의 의지를 더욱 새롭게 한 계기가 됐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지도자들과 참모진들이 한국민의 심각한 관심사에 대해 이해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레이건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정부로 하여금 민주주의와 인권정책을 강화하는 미국의 일관된 주의(主義)를 되새기게 만드는 기회가 됐다는 것도 성과였다. 레이건 대통령은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방법으로 이같은 일을 해냈다.

2차 정상회담을 위해 우리가 한국측과 자리를 함께 한 직후 미 대통령이 얼마나 유머가 있고, 또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가 생각케하는 한 대화가 있었다. 전대통령은 전방 전초기지와 같은 노출된 장소를 방문한 레이건 대통령의 용기에 깊은 존경의 뜻을 표하면서, 그 위험성과 레이건 대통령의 안전때문에 자신의 참모진들에게 시시각각 보고하게 했다는 것을 레이건 대통령에게 말했다. 그때 미 대통령은 재빨리 이렇게 응수했다. 『낸시에게는 그 얘기를 하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는 낸시 레이건 여사가 정말로 걱정했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그때는 81년 3월 남편에 대한 암살기도가 있은 다음이었고, 또 불과 한달전 북한이 도발한 미얀마 랑군테러 사건으로 전 언론매체가 떠들썩할 때였다.

레이건 대통령이 서울북쪽에서 종일 미군 및 한국군과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그의 영부인은 매력적인 외교관으로서의 자질을 자연스럽게 보여줬다. 내 아내 세니는 경복궁내 국립박물관에서 열린 리셉션에서 낸시여사와 한국 여성 지도자 및 예술가들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거기에는 정부관료의 부인뿐 아니라 여권(女權)신장과 평등을 위해 일해온 지도자로 우리가 알고 있던 많은 여성들도 있었다. 참석자중 이태영(李兌榮) 가정법률상담소장, 정의숙(鄭義淑) 이화여대 총장(현 이화학당 이사장), 손인실(孫仁實) 여성단체협의회장, 김인숙 한국여학사협회 회장등은 우리의 좋은 친구들이었다. 우리의 친한 친구로 칼럼니스트이자 유명한 수필가인 이경희(李京姬)씨는 레이건 대통령 방문이 끝난지 불과 일주일후에 낸시 여사에 대한 칼럼을 썼다. 거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첫인상을 종합한다면 국립박물관에서의 당신의 첫모습은 아주 우아했습니다. 물론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당신의 사진은 보았지만… 「당신은 정말 매혹적인 사람이었습니다」라고 나는 내 자신에게 고백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의 국빈방문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미 대통령 영부인이며 한국민에게 매우 소중한 당신에게 어떻게 인사해야 할지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시 한 귀절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은 단지 노래가락뿐입니다」 사실 우리 한국민은 노래가락처럼 충심어린 우정과 성실한 마음으로 당신에게 인사할 뿐입니다』

후에 낸시여사는 그렇게 매혹적이었던 한국 미술작품을 전시했던 박물관을 방문했을때 정말 즐거웠다는 내용의 편지를 우리에게 보냈다. 오후에 그는 「소년의 집」을 방문해, 한국 전통의상인 한복을 입고 있는 자신과 레이건 대통령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선물로 받았다. 그리고는 미국 어린이들이 보낸 커다란 피아노 한대를 선물로써 그곳 한국 어린이들에게 전달했다. 약 2,000명의 어린이 합창단이 「미국민에 하늘의 축복을」이란 노래를 영어로 불렀을 때 그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다.

한국을 떠나는 날 아침 레이건 대통령과 슐츠 국무장관은 서울에서 미 상공회의소 직원 및 미국 민간인들과 간단한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는 공항으로 떠났다. 20㎞쯤 되는 도로에는 믿기지 않을만큼 많은 군중들이 나와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떠나는 미 대통령 부부를 열렬히 환송했다.

한국언론들의 논평은 대단히 우호적이었다. 당시 언론에 대한 엄격한 통제는 대부분 완화돼 있었다. 보도지침은 모든 것이 우호적인 것으로 나타났으며, 또 그렇게 보였다. 청와대에서 언론에 어떤 지침을 줬을까 하고 대사관이 안달하지 않아도 됐던 한 경우였다. 매우 흥미로운 글로 나의 관심을 끌었던 한 칼럼니스트는 미 대통령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는 매우 친절하고 너그러운 할아버지 같았습니다. 그의 얼굴표정이나 행동에서는 어떤 권위적인 면도 찾아볼수 없었습니다. 세계 초강대국의 대통령으로서 어떤 거만함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매우 예의바르고, 미소를 잃지 않았으며, 겸손하고 마음 따뜻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몇몇 한국인들은 이 글이 전대통령은 레이건 대통령과는 정반대라는 것을 우회적인 방법으로 암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종렬(劉鍾烈)씨는 계속해서 이렇게 썼다. 『미 대통령은 훌륭한 성과를 얻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한국민의 진정한 우정입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두번째날 정상회담에서 전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내가 그동안 특히 주의를 기울였던 한 문제가 언급됐다. 『미국은 한국이 동등하게 참여하지 않는한 어떤 일이 있어도 북한정권과 대화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즘 가끔 워싱턴의 정책입안자들에게 상기시켜줬으면 하는 것들이 있다. 한국방문중 미 대통령이 보여준 헌신적인 노력이었다. 그것은 정상회담에 이어 나온 공식 공동성명에 포함돼 있었다. 최근의 미국 정책은 과거 외교사를 정말로 얼마나 빨리 망각하는지 보여주고 있다.<번역=황유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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