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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개혁의 막전막후:5(문민정부 5년: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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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개혁의 막전막후:5(문민정부 5년:17)

입력
1998.04.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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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山 기무사 들락날락 軍정보 장악/현철, 진급대상자 미리 알려준뒤 ‘내사람’ 암시 군내인맥 넓혀/軍 요직인사 좌지우지… ‘개혁5인방’·경복고·PK출신 부상/하나회 사라진 자리엔 또 다른 私조직 ‘현철라인’ 들어서『증인은 김동진(金東鎭)국방장관을 육참총장시절에 롯데호텔에서 만난 적이 있지요?』 『그렇습니다』 『그때 국방장관을 맡을 의사가 없느냐고 타진했지요?』『제가 그 분을 처음 뵌 것은 그 분이 합참의장이실 때 입니다. 당시 의장님이 공관화재로 가정적으로 큰 불행을 겪으셔서 동문 몇분의 제안으로 뵌 적이 있습니다』

97년 4월25일 열린 한보사건 관련 「김현철(金賢哲) 청문회」에서 오간 국민회의 조순형(趙舜衡)의원과 현철씨의 문답내용이다. 실제로 현철씨와 김동진씨는 이병태(李炳台)국방장관이 『신도시가 대전차 장애물로 이용되도록 돼있다』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던 94년 여름 경복고 동문들과 함께 만났다. 현철씨가 김 총장에게 『장관을 맡는 게 어떠냐』고 제의한 것도 이 자리. 하지만 김총장은 80년 5·18당시 연대장으로 광주에 파병돼 민간인 오인사살 혐의로 고소된 점 등을 들어 고사했다. 따라서 『김장관을 합참의장 시절에 처음 만났다』는 현철씨의 답변은 거짓인 셈이다.

같은 해 1월 중순 롯데호텔 지하 중식당. 현철씨는 육군대장 Y씨와 마주 앉았다. 『사령관님이 군개혁하느라 애쓰신다는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각하덕분에 군이 제자리를 찾고 있습니다. 하나회같은 정치군인은 더이상 발붙일 자리가 없을 겁니다』 이 장성은 이후 군내 최고위직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했다.

『김영삼(金泳三)정권시절 군에서 잘 나가던 인사치고 현철씨를 만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말이 한때 유행했듯이 현철씨는 정권출범 초기부터 김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업고 군요직 인사를 좌지우지했다. 그는 진급예정 장성들을 미리 만나 자신의 영향력을 은근히 과시한 뒤 「당신은 이제부터 내 사람」이라는 암시를 주는 방식으로 군부 인맥을 넓혀갔다고 군관계자들은 전하고 있다. 96년 가을 모군 총장으로 진급한 장성은 몇달전부터 현철씨로부터 『걱정마십시오. 아버님께 이미 결심을 받아놓았으니 마음의 준비를 해 두십시오』라는 통보를 받았을 정도. 때문에 장성들 사이에는 『아직도 그 분(김현철)을 만나지 못했느냐』는 자조섞인 얘기가 돌아다니기도 했다. 하나회출신 예비역 소장 C씨의 회고.

『하나회 척결작업이 한창 진행되던 93년 봄이었습니다. 육본 근무시절 한 후배 장교가 「지금처럼 중요한 시기에 손을 놓고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 다리를 놓아 줄테니 현철씨를 만나보라」고 종용했지만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후 그 장교가 다시 찾아와 「저쪽(현철씨)에서 장군님을 좋게 생각하고 있으니 한 번 만나기만 하라」며 설득하는 거예요. 군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주변에는 「소산(小山)을 만났다」며 자랑하고 다니는 장성마저 있었어요』 C씨는 이후 국방부 정책위원 등 한직을 맴돌다 95년 전역했다.

문민정부에서는 이른바 「개혁 5인방」이 이너서클(inner circle)을 형성, 숙군(肅軍)과 인사를 주도했다는 게 정설이다. 정권초기를 기준으로 권영해(權寧海)국방장관, 김동진육참총장, 윤용남(尹龍男)3군사령관, 임재문(林載文)기무사령관 등이 그들. 이들의 부상 역시 현철씨와 무관치 않다는 지적이다.

현철씨가 군부에 처음 손을 뻗친 것은 구 민자당의 차기 대선후보 향배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92년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상도동캠프의 지상과제는 「노심」(盧心·노태우 전대통령의 의중)을 YS에게 끌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YS와 측근그룹은 노전대통령의 친위집단인 군장성들을 은밀히 만나 도움을 요청했고 현철씨도 아버지를 대신해 군부와 접촉했습니다. 덕분에 예비역 중장 A씨의 경우처럼 하나회출신이면서도 반(半)공개적으로 YS지지 의사를 표명한 장성도 나왔어요. 군부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이때부터 형성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도동 관계자 Q씨의 전언이다.

현철씨는 자신의 군맥을 활용, 군의 정보까지 장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기섭(金己燮)안기부 기조실장을 통해 안기부를 주물렀던 것처럼. 이에 관한 청와대 비서관출신 Y(현 한나라당의원)씨의 증언.

『현철씨가 기무사에 드나든다는 것은 청와대에 다 알려진 사실이었어요. 건강검진이나 신병치료를 이유로 기무사내 지구병원에서 며칠씩 머물곤 했지요. 기무사령관과도 일주일에 한번씩 만났다고 합니다. 과거 정권에서 시행되던 대통령과 사령관의 정기 독대가, 서완수(徐完秀)사령관 전격교체후 군의 정치개입 차단을 목적으로 폐지됐던 때인데도 말입니다. 기무사령관의 직급이 정권초기에 준장으로 강등됐다가 나중에는 중장으로 오히려 격상된 것이 양측의 밀월관계를 말해주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Y씨의 말대로라면 기무사는 사실상 현철씨의 사설 정보기관으로 전락한 것이다.

하나회가 떠난 군요직에는 거대한 「김현철 라인」이 들어섰다. 현철씨를 정점으로 권장관 등이 실세그룹을 형성했고, 이들이 각기 관리하는 인맥이 영관급까지 포진했다. 그리고 이 인맥은 대부분 「만나회」와 「나눔회」에 속했다. 하나회척결이후 또 다른 사조직이 그 자리를 매운 셈이다. (이 대목은 나중에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이와함께 현철씨의 모교인 경복고 출신과 PK의 득세도 문민정부 군인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예를 들어 합참의장과 국방장관을 지낸 김동진씨와 청와대 국방비서관을 거쳐 수기사단장 인사참모부장을 역임한 김희상 O군 부사령관은 경복고출신이다. 또 이병태 전국방장관, 김광석 전청와대경호실장, 윤용남 전합참의장, 임재문 전기무사령관은 모두 PK인사들이다.

그의 영향력은 군인맥관리와 정보장악에만 그치지 않았다. 국정전반에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던 현철씨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군을 서슴없이 이용했다. 95년 김홍렬(金弘烈)해참총장을 조기 전역시켜 민자당의 충남 서천 지구당위원장을 맡긴 것이 대표적 사례. 당시 고위당직자 Z씨의 증언. 『김전총장의 영입은 현철씨 사조직의 여론조사와 건의가 결정적 동기가 됐습니다. 그 해 탈당한 JP를 견제하기 위한 인물을 물색하던 중 군의 평가도 좋고 고향에서도 인기가 있는 김씨가 떠오른 것이지요. 이같은 보고를 받은 YS가 그를 데려오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오로지 정치적 판단에 따라 통상임기(2년)가 석달이상 남은 현직 해참총장의 옷을 벗겨버린 것이다.

이와는 경우가 약간 다르지만 15대 총선을 몇달앞둔 96년1월 예비역대장 K씨도 현철씨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을 받았다. 『롯데호텔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는데 대뜸 그래요. 「장군님이 고향(충북)에서 자민련후보로 출마하신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당 의원님이 어려워질 것 같아서 자제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출마하면 보복하겠다는 의미였어요. 내심 짐작은 했지만 불쾌한 생각이 들어서 「잘 알았다」고만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대목은 일주일전 청와대의 L수석이 「대통령의 재가가 떨어졌다」며 민자당에 입당해 출마할 것을 권유했다는 사실입니다. 현철씨가 아버지의 결심을 뒤엎을 만큼 무소불위의 권세를 갖고 있었다는 증거지요』 15대 총선때 충청권에서 거세게 불었던 자민련바람에 비추어 자민련의 공천을 받았다면 승산이 매우 높았을 터였지만 K씨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출마를 포기했고 현재는 국민정부의 고위직을 맡고 있다.

군부에 대한 현철씨의 이같은 전방위적 개입이 군지도부와 권력의 유착을 불러 군개혁을 왜곡, 변질시켰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윤승용·유성식 기자>

◎군부내 PK의 약진­장성진급자 30%선 차지/각군수뇌·3司 거의 장악/이병태국방 “우대 전형”

김영삼(金泳三)정권 군인사의 가장 큰 특징은 김대통령과 동향인 PK출신의 약진을 들 수 있다. 이런 현상은 군개혁 태풍이 휘몰아쳤던 93년 한해동안 실시된 3차례 정기인사와 3,4차례의 통수권차원 인사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육군의 경우 6공의 마지막 군인사인 92년말 준장진급 인사에서 전체 진급자 47명 가운데 PK출신은 10명으로 21%를 기록했으나 93년에는 총 43명중 14명을 배출, 32%를 차지했다. 또 94년 5월 공군인사에서도 준장 진급자의 31%가 이 지역출신이었다. 이는 6공말기 인사에서 10%를 밑돌았던 것과 대조적이다. 해군의 경우도 PK인사가 93년 진급자의 30%였다.

지역편중은 이후 군수뇌부 인사까지 이어졌다. 95년 하반기를 기준으로 윤용남(尹龍男)육군총장, 김홍래(金鴻來)공군총장, 이상무(李相武)해병대 사령관 등 각 군 수뇌의 4분의 3을 이 지역 출신이 차지했다. 여기에다가 기무사, 수방사, 특전사 등 대통령 친위부대 3사(司)중 임재문(林載文)기무사령관, 한승의(韓勝義)수방사령관이 역시 PK출신이었다. 같은 장성이라도 「알짜 보직」은 PK가 대부분 장악하고 있던 셈이다.

93년12월 「이병태(李炳台)국방장관」의 발탁은 「PK우대」의 전형으로 군부에서 회자됐다. 이씨는 문민정부 군개혁의 표적이었던 하나회출신이어서 당시 그가 국방총수의 자리에 오를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과연 대통령의 고교(경남고)후배가 세긴 세다』는 뒷말이 나온 것은 당연했다. 물론 PK출신중에는 평소 객관적 능력과 자질을 인정받고 있었거나 재임중 업적을 남긴 사람도 적지 않지만, 일부는 『고향덕에 벼락출세했다』는 수군거림을 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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