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지펀드 1,100억弗에 파운드貨 항복… 두려움 엄습”「검은 9월」. 92년 9월 유럽은 암흑천지였다. 금융선진국을 자부하는 영국을 비롯해 이탈리아 스페인등 유럽 전체가 사상 초유의 금융대란에 직면해 있었다. 당시 외환은행 런던지점의 딜링책임자로 일하고 있던 13년 경력의 고참딜러 정청원 과장. 그는 그때 유럽의 금융대란을 직접 목격하면서 일종의 「쇼크」를 받았다고 했다.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계 기축통화중의 하나인 파운드가 핫머니의 위력에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질지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습니다』
정과장은 『「검은 9월」은 국제 환투기의 극치를 보여준 최초의 사건이었다』고 소개했다. 핫머니의 공격대상은 당시 유럽국가에 적용되던 환율조정기구(ERM)라는 독특한 통화제도였다. 99년까지 유럽 단일 통화권 구축을 목표로 운영하던 준 고정환율제도였다. 당시 ERM에 묶여있던 유럽국들은 통일비용을 치르기 위한 독일의 고금리정책에다 자국의 경기침체등으로 평가절하압력을 받고 있었다. 헤지펀드에게 좋은 먹이감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환차익을 챙기기 위해 동원된 헤지펀드의 규모는 1,100억달러. 국제적인 환투기꾼 조지 소로스가 선봉장에 섰다. 영국 중앙은행의 경우 3개월동안 400억달러의 외환보유고를 팔면서 파운드화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막대한 규모의 환투기 자금에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국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국을 ERM에 가입시켰던 메이저총리는 스스로 ERM 탈퇴를 선언하는 정치적 굴욕을 감수해야 했다.
불길한 예감. 정과장은 당시 언젠가는 이런 핫머니세력들이 다른 국가는 물론 우리나라도 침공해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다.
먼저 동남아국가들이 당했다. 「경상수지 적자 153억달러(96년). 경제성장률 6%대 추락. 단기외채비중 48%」 헤지펀드들의 대규모 공습을 앞둔 97년 태국의 경제지표였다. 태국통화인 바트화의 가치절하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외국자본유치를 통해 경제발전을 추진해온 태국정부는 외국자본의 이탈을 막기 위해 절하압력을 거부했다. 헤지펀드들은 이같은 허점을 파고들었다.
『또 핫머니가 일을 내는구나』 외환은행 본점 딜링룸에 있던 정과장은 전세계 외환시장의 다이나믹한 변화들이 시시각각 반영되는 딜링머신위에서 핫머니의 위력을 또 한번 목격할수 있었다.
헤지펀드들은 일본과 태국의 금리차를 이용한 차익거래를 이용해 태국금융시장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저리의 엔화를 빌려 20%대의 금리를 보장하는 채권시장에 투자했다. 헤지펀드들은 또 바트화 절하에 대비, 채권시장에 투자한 자본을 달러화로 일제히 바꾸기 시작했다. 달러화 수요가 급증하자 바트화는 속수무책으로 폭락했다.
다음차례는 어디일까. 정과장은 『아직 우리나라는 외환시장이 완전 개방돼 있지 않아 영국과 태국같은 핫머니공격의 소지는 상대적으로 적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과장은 『요즘 갈수록 비중이 커지고 있는 외국자본의 움직임이 환율의 등락에 따라 치고 빠지는 핫머니의 속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고 염려하면서 『핫머니공격에 대비한 철저한 준비작업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김병주 기자>김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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