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정계개편이 아니라 한국정치의 죽음과 부활”1997년은 평화적 정권교체를 처음 이룩한 해라기 보다 IMF시대의 원년(元年)이다. 김대중 「국민의 정부」는 정권교체를 지나치게 자부해서는 안된다. 5년전, 오랜 군부통치를 종식시킨 김영삼 「문민정부」의 출범도 지금의 정권교체 못지않은 국민적 갈채를 받은 바 있거니와, 국민회의·자민련의 공동집권 또한 진정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희석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지금은 IMF관리체제라고 하는 미증유의 국가위기시대이다.
모든 것이 변하고 매사가 달라져야만 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국가개혁이 그렇고 행정혁신이 그러하다. 경제적 구조조정이 그러하고 노·사·정관계의 재정립이 그렇다. 그러나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 이땅의 정치인들이다. 대표자로서의 자질은 커녕 시민적인 교양도 없고, 지도자로서의 신의는 커녕 인간적인 의리도 없는 우리들의 선량(選良)이 IMF의 시대정신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정국은 또 다시 「철새」의 계절이다. 당적을 옮기는 국회의원이나 지방자치 단체장이 꼬리에 꼬리에 물고 있다. 세간의 여론도 의외로 담담하다. 더 이상 놀랄 가슴도 없고 더 이상 화를 낼 기력조차 없는 탓일까. 정치인들의 변절행각은 마침내 한국정치의 전통과 관행으로 정착하고 있는 듯하다.
막스 베버의 표현처럼 정당이란 「권력의 집」이다. 집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처럼 정당도 새로 지을 수도 있고 고쳐 지을 수도 있다. 또한 분가할 수도 있고 다시 모여 살 수도 있으며, 주인이 달라질 수도 있고 식구가 바뀔 수도 있다. 마음에 드는 집을 찾아가는 사람을 누가, 어떻게 막으랴. 하물며 지난 대선이후 권력의 집들이 모여사는 동네풍경은 누가 봐도 어수선하다. 여소야대현상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문제는 그 동네가 그다지 오래 가지 않을 것같은 국민적 예감이다. 고가(古家)로서의 품위나 명가(名家)로서의 개성도 찾아보기 어렵거니와, 바람이라도 크게 불면 날아가지 않을까 불안하다. 최근의 여론조사를 보더라도 정계개편의 가능성에 대해 국민들은 대체로 「올 것이 오는」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철새」정치인들을 크게 나무랄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꼭 따져 물어야 할 질문은 정치인들의 변절이 왜, 그리고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근대정당은 파벌이나 붕당과는 다르다. 정당의 존재 이유는 권력쟁취 그 자체를 최종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국리민복(國利民福)의 증진을 도모하는데 있다. 정당의 존재근거를 헌법이 보장하는 것도 바로 이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정당은 궁극적으로 정책으로 승부해야 하며 당적 또한 정책의 차별성에 입각해야 하는 것이 정당정치의 생명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인물정당이나 지역정당만이 존재한다. 당적의 선택기준 또한 전근대적 연고주의가 우선한다. 정당의 본말이 전도되어 있기 때문에 당적 변경은 그만큼 쉽고도 뻔뻔스럽게 해치울 수가 있는 것이다.
정치적 신념이 중요하지 않은 까닭은 그것의 기반이 되는 이념과 정책이 차별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지조가 중요하지 않은 까닭은 그것을 포기한지 모두가 오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한국정치의 고질적인 후진성을 정치권이 스스로 개혁하리라는 기대는 아예 버리자. 기댈 것은 국민의 힘밖에 없다. 당장 오는 6·4지방선거를 선택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로 삼자. 또한 정책결정과정을 국민들이 공개적이고도 투명하게 감시·감독할 수있도록 국회법 개정을 위한 시민운동을 전개하자. 언론 역시 출신지나 학벌 따위가 아니라 입법 경력을 중심으로 정치인을 소개하고 평가하자. IMF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정권교체나 정계개편이 아니라 한국정치 자체의 죽음과 부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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