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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 대통령의 한국 방문:1(한국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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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 대통령의 한국 방문:1(한국의 추억)

입력
1998.04.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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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 환영” 150만 人波 깊은 인상/지미 카터 대통령때와 달리 축제분위기 “성공적 訪韓”/랑군폭탄테러로 긴장감… 거처 조선호텔서 대사관저로/국회연설 이산가족 재회·자유혈맹 강조 한국민에 감동83년 11월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 부부의 한국 국빈방문은 전세계의 주목을 끌었고, 일주일이상 한국 신문과 방송의 주된 관심사가 됐다. 미 대통령 방문에 대한 언론보도는 훌륭했다. 또 여러면에서 뉴스로서의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내 임기중 있었던 여러 핵심적인 일들중 하나로 여겨질만 했다. 당시 일반인이 미처 감지하지 못했을 법한 몇가지 개인적인 일화를 소개하겠다.

한국으로 떠나기전 워싱턴에서 대사부임에 따른 준비를 하던중 다른 3개국에서 미 대사로 근무한바 있던 한 친구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딕시(미국 남부 주(州) 혹은 그 출신의 속칭), 대통령 방문같은 일은 제발 생기지 않도록 빌게. 그것은 대사가 다뤄야 할 일중에서 정말 골치아픈 일이라네!』 레이건 대통령 부부의 방문에 대한 준비작업을 진행하면서 나는 그 충고의 의미를 점차 이해하게 됐다. 일이 모두 끝나고 모든 것이 무난히 마무리된 뒤 내 아내와 나는 대통령 방문은 우리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지나치지 않은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우리 정부가 견지하고 있는 원칙과 중요 우방국에 대한 미국의 확고부동한 결의를 명확히 전달했던 미 대통령을 소개할수 있는 기회를 갖었다는데 엄청난 자부심을 느꼈다.

특히 냉전이라는 팽팽한 긴장시기에서의 대통령 방문에는 국내건 외국에서건 일반인이 알지 못하는 통신업무와 안보에 관련된 면이 많이 있었다. 예를 들어 대통령 리무진에는 「블랙 박스」를 항상 지니고 다니는 최고위급 비밀요원이 미국의 비상 지휘본부와 상시 연락체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특수전자장비가 갖춰져 있었다. 그래서 미 대통령은 항상 자신의 관용차를 이용해야만 했다. 만약 방문지가 한곳 이상이면 비행기로 똑같은 기능을 가진 리무진을 다른 곳으로 실어날랐다. 그 요원에게는 워싱턴 및 주요 동맹국 지도자들과 대화할수 있는 많은 통신채널이 필요했다. 그러나 외국의 해당국 지도자들은 당연히 공식 방문객들이 주재국의 특수차량을 이용해 주기를 원했다.

미 대통령에 대한 보안에는 정말 철저한 준비와 조사가 요구됐다. 어떤 때는 주재국에 지나치게 참견하고 나서는 듯한 인상을 받을때도 있었다. 「시크릿 서비스(Secret Service)」(미 재무부산하 특수정보부대)와 여타 비밀요원들은 대통령 방문에 앞서, 한두달전에 미리 몇차례 사전답사를 했다. 레이건 대통령의 한국 방문은 특히 당시가 대한항공 007기 피격사건이 발생한지 두달이 채 안된 시기였고, 또 미얀마 랑군폭탄테러 사건이 터진지 한달밖에 되지 않은,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때였기 때문에 미 대통령측으로서는 정말로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답사팀은 방문단이 묵을 호텔을 여럿 조사했다. 조선호텔 호텔신라 하얏트호텔 프라자호텔등이 당시 적당한 곳으로 여겨졌다. 방문단에는 16명의 공식 수행원과 110명의 비공식 수행원이 있었다. 비공식 수행원에는 참모진, 취재단, 보안요원, 그리고 통신전문가들이 포함됐다. 각 호텔측 실무진들이 자신의 호텔에서 미 대통령을 맞는 영광을 얻고자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내 아내와 나는 처음에 대통령 부부에게 편지를 띄워 대사공관에 머물 것을 요청했다. 그들은 거절했다. 그러나 랑군사태가 터지고 답사팀에 의해 대부분 호텔의 보안상태에 대한 몇가지 문제점이 발견된뒤 레이건 대통령부부는 대사 관저를 거처로 정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됐다. 그러나 거기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관저에 기거해야 할 레이건 대통령의 특수 참모진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아내 세니와 나는 호텔로 자리를 옮길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기밀이 요구되는 사안이었다. 일반인들은 미 대통령측이 조선호텔을 선택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앞서 2주동안 조선호텔 20층 전층을 사무실과 통신센터로 바꿨다. 대사관저 지하실에는 일반인이 수용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통신배전반과 전자장비가 갖춰져 있었다. 아내와 나는 또 모든 옷장과 서랍을 비워줘야 했다. 그것들도 모두 당시 철저한 검색을 받았다. 이와같은 것들은 당시 해야했던 일중 몇가지 사소한 것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또한 미 대통령의 외국방문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작업인가를 보여주는 계기이기도 했다.

내 아내와 나에 대한 공식일정을 적어놓은 것이 30쪽이 넘는다는 데에서도 알수 있듯, 미 대통령에 대한 병참술에는 다른 여러 측면이 있었다. 우리 부부의 일정은 11월12일 오전 10시25분 미 대통령 전용기가 도착해서 14일 오전 10시35분 이한(離韓)할 때까지 우리가 어디에 서야하고, 매순간 어떻게 해야 하는가로 가득차 있었다.

김포공항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가두(街頭)에는 학생고적대를 비롯, 『로널드와 낸시여사를 환영합니다』『당신들이 그렇듯이 우리도 당신들을 사랑합니다』라고 쓴 플래카드를 든 시민단체들, 기쁨에 들뜬 군중들로 가득했다. 150만명이상을 헤아렸다. 축제기분으로 가득차고 또 그만큼 중요한 날이었다.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참모진들은 환영인파가 정말 인상적일수 있도록 일에 만전을 기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한국민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전임 지미 카터 대통령에 대한 인식이 별로 좋지 않았던 터여서 더욱 그랬다. 레이건 대통령 부부는 그날의 환영인파는 두고두고 가장 인상깊은 것이었다고 우리들에게 말했다. 레이건 대통령 부부가 방문일정을 마치고 김포공항으로 되돌아갈 때는 군중들이 더 많았다(200만명은 될 것 같았다). 이번만큼은 그들은 소집된 사람이 아니었다. 방문은 너무나 성공적이었다. 미 대통령은 한국과 한국민에 대한 미국의 의지를 훌륭히 전달해 한국민들에게 정말 깊은 감동을 주었다.

대통령의 첫번째 공식일정은 불과 도착 2시간후에 예정된 국회연설이었다. 대사관은 국무성 및 백악관과 협의해 국회에서의 대통령 연설문을 준비했다. 내용은 한국어와 영어로 미리 작성됐다. 그러나 도쿄에서 서울로 오는 길에 레이건 대통령은 내용을 검토한뒤 몇가지 중요한 부분을 수정했다. 몇몇 단락은 삭제하고, 자신의 생각을 첨가했다. 원문을 기획하는데 참가한 한사람으로서 나는 레이건 대통령이 첨가한 부분에 대해 관심을 갖었다. 솔직히 나 스스로 그런 의미있는 말을 생각해내지 못한데 대해 부끄러움을 느꼈다. 레이건 대통령은 한국전에서의 미군의 희생때문에 한국민들이 매우 깊이 감사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신세를 졌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썼다. 그는 또 한국의 몇가지 업적과 미국이 받은 도움을 연대별로 기술했다. 거기에는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의 불굴의 희생도 포함됐다. 레이건 대통령은 『그 이후로 미국에 대한 한국의 빚은 모두 갚은 셈이라는 것을 이 자리를 빌려 말씀드린다』고 했다. 레이건 대통령이 국회에서 연설한 이같은 개인적이며 친밀한 발언은 참석한 모든 한국민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청중중 눈가에 눈물이 맺히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중에 우리는 TV를 시청한 모든 국민도 똑같은 감동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북한에 대해 미 대통령 자신의 의견을 직접 표명했던 연설은 더욱 감동적이었다. 북한지도자들도 이 연설을 분명히 밀착해서 지켜보았을 것이었다. 긴장감이 감도는 비무장지대(DMZ)를 경계로 헤어진 이산가족을 돕자는 남한의 캠페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언급하면서 레이건 대통령은 『지금 나는 이산가족을 재회하게 하자는 남한의 캠페인에 북한이 협력할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이산가족의 재회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라고 단언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한국의 경이적인 경제발전에 대해 강한 신뢰감을 표시했다. 서울에서 개최되는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에 대해 환영의 뜻을 나타냈을 때에는 갈채가 터져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다음과 같이 연설함으로써 한국민의 주요 관심사를 충실히 다뤘다. 『모든 도발자들은 미국민과 한국민이 한 목소리를 내는 단합된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은 결코 노예가 될수 없으며, 자유는 대한민국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대사관에서 준비한 통역사, 잘생기고 명민했으며 금발의 젊은 해외근무요원이었던 데이비드 스트라우브도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됐던 대통령 연설과정에서 빼놓을수 없는 한면이었다. 미국인 대부분은 한국어를 발음하고, 관용적인 표현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스트라우브의 한국어 실력은 완벽했고, 많은 한국인들은 그의 능숙한 솜씨에 경탄했다. 특히 대통령이 연설 원문에서 벗어나 즉흥적으로 말할 때에는 더욱 그랬다. 그의 능숙한 일처리는 우리가 진정 한국문화에 관심을 갖고 있고, 또 좋아한다는 것을 전달하는데 많은 도움을 줬다.

대통령 연설후 국회 본관 1층 로비인 로턴더홀의 리셉션에서 나의 오랜 친구이면서 전 주미대사이자 외무장관을 지냈던 박동진(朴東鎭)씨가 온 얼굴이 눈물로 범벅인 된 채 나와 나란히 자리를 같이 했다. 인사말을 건네자 그는 나에게 『대사, 나는 내 생애 가장 훌륭했던 두 연설을 들을수 있었습니다. 첫번째는 서울이 수복된뒤 맥아더 장군이 했던 것이고, 두번째는 내가 지금 막 들은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흐느끼기까지 하며 깊은 격정에 사로잡혔다.

우리는 청와대에서의 공식오찬을 위해 국회를 떠났다. 다음 일정을 준비하기 위한 1시간반정도의 짧은 시간이 있었다. 일정에는 조지 슐츠 국무장관과 내가 외무부에서 이원경(李源京) 장관 및 박건우(朴健雨) 미주국장과 회담하는 즐거운 자리가 포함돼 있었다. 박국장은 김영삼(金泳三) 정부하에서 미 대사를 지냈다. 슐츠 장관과 이장관과의 관계는 훌륭히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한국과 미국정부가 효과적으로 협력할수 없을 만한 외교정책상의 심각한 문제점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금방 알수 있었다.

우리는 다시 미 대사관 무역관을 방문하기 위해 한시간정도 시간을 내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레이건 대통령이 대사관 참모진 및 한국의 지도급 사회·학계 인사들을 만나도록 주선했다. 인사들중에는 교회에서 활동중인 사람도 있었고, 인권단체 사람들도 있었다. 다음 행사는 청와대에서의 공식 국빈만찬이었다. 이 모든 것은 매 순간순간 철저한 계획에 의해 진행됐다. 양국 대통령 참모진들은 조용히, 그러나 효과적으로 협조해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게 했다.

한국측 의전담당자들의 일솜씨는 경이로웠다. 나는 한국민들이 의식을 매우 중시하며, 행진 및 좌석배치에 대한 순서에서도 매우 일관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들은 또 손님들을 편안하게 하기위해 자신들이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해시켜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청와대 영빈관에서의 국빈만찬은 완벽했다. 양국 대통령의 간단한 공식 연설에 이어 한국의 전통 장인(匠人)들의 짤막한 공연을 통해 매혹적인 한국 뮤지컬과 춤솜씨를 접할수 있었다.

한국 대통령은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과 한국은 100년이상 좋은 친구였으며, 한세기동안 우정과 협력관계를 돈독히 해왔습니다. 우리 양국은 지금 다음 세기로 진입하면서 우정과 협력관계가 영원히 계속되기를 희망합니다』

레이건 대통령은 답변연설에서 그가 국회에서 강조했던 몇가지를 다시 언급했다. 그는 대한항공 007편에 탑승했던 무고한 시민들의 희생과 불과 한달전 발생한 랑군에서의 『사악한 공격』에 대해 얘기했다. 그는 한국 동맹국들이 직면하고 있는 위협을 인식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이 위협적인 도전에 맞서 평화를 지키는데 함께 협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는 『역사는 자유의 편입니다』라는 즐겨하는 경구를 다시한번 확인한뒤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한미관계의 새로운 시대는 과거보다 더욱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양국 국민에게 힘찬 번영과 새로운 우정, 자신감, 그리고 진정한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모두가 열렬히 바라던 것들입니다』

이렇게 해서 레이건 대통령부부와 수행원들의 꽉찬 하루일정이 끝났다. 내 아내와 나로서는 진정 감동적인 시간이었다. 방문은 매우 긍정적인 분위기속에 진행돼 우리는 겪었던 여러 다양한 일들에 대한 인상을 서로 나누며 밤새워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레이건 대통령 부부의 분위기에 대해, 그리고 한국 동맹국들과 미 대통령에 대한 동맹국들의 이해를 돕는데 이번 방문이 거둔 분명한 성공에 대해 아내 세니도 나처럼 흥분된 상태였다.<워커 前 주한 美 대사 번역="황유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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