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주는 정말 돌이키고 싶지 않을만큼 끔찍하고 슬픈 일들이 이어졌다. 숨진 엄마의 팔을 베고 열흘을 보낸 세살박이 소녀와 생활고로 부엌 천장에 목을 맨 아들을 일주일간이나 바라보기만 해야했던 중풍걸린 노모 때문이다. 두 사건은 사회면에서 종종 보게되는 끔찍한 범죄와는 또다른 아픔과 충격을 주었다.세상이 험해지고 있다. 옛날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우리의 가슴을 저리게 한다. 그러나 학자들은 지금이 험악한 세상의 시작일 뿐이라고 목청을 높인다. 오로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한 생존 차원의 범죄와 억울한 죽음이 늘 것임은 분명하다. 인심도 변하고 있다.
부산의 50대 주부가 보낸 편지(3월31일자 6면 「편집자에게」게재)는 그런 인심의 흐름을 생생히 읽게 했다. 그저 실직한 가정의 사연이려니 무심히 읽어 내려갔으나 몇줄 지나지 않아 가슴이 내려앉는듯 했다. 그는 아는 체하며 신문에 칼럼을 쓴 이들의 웃는 낯을 보면 쓴웃음이 난다고 했다. 또 그의 일가는(군복무를 정상적으로 마친 큰아들을 포함해서) 누구보다 성실하게 국가와 사회가 요구하는대로 살아왔지만 요즘은 어쩐지 억울한 느낌이 든다고 했다. 그의 편지는 『결코 오늘의 사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언론은 거리로 내몰린 이들의 허탈과 분노앞에 겸허해야 한다』로 맺었다.
적당히 체념하며 인고의 세월을 살아온 50대 주부에게서는 하소연일망정 삶에 대한 애정과 기대가 느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주부의 글에는 『그래 잘난 사람들끼리 잘먹고 잘살아라』는 비아냥이 들어 있었다. 언젠가는 나도 잘난 당신들만큼 잘살아보겠다는 최소한의 오기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이 험해지면 독자의 소리가 어두워지는게 당연하다. 그리고 그런 불만과 원망의 소리가 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카타르시스해야 한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원망의 편지마저 끊기는 것 같아 두렵다. 그 주부에게서 『지금도 역시 고달프다. 그리고 우리 가족의 삶을 이렇게 구긴 사람들이 밉다. 그러나 한번 더 열심히 살아보겠다』는 다음 편지를 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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