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회 제거’ 불붙인 명단 살포/93년 4월2일 동빙고동 군인아파트에 142명 명단 뿌려져/수사나선 軍수뇌부,살포자 정체보다 명단진위에 초점 맞춰/權 국방 ‘싹쓸이’ 추진… 집단행동우려 인사관리 ‘목죄기’ 전환93년 3월. 화려하게 출범한 문민정부는 정권창출의 기쁨을 만끽할 사이도 없이 언론에 의해 잇달아 터져나온 「재산공개의혹 파문」과 「자녀부정입학 시비」 사건으로 영일이 없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3월8일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은 김상철(金尙哲) 서울시장과 박양실(朴孃實) 보사부 장관 등 첫 내각의 장관 4명을 경질하면서 김진영(金振永) 육군참모총장과 서완수(徐完秀) 기무사령관도 동시에 교체했다. 당시 정가는 공직자 재산공개 파문으로 바짝 달궈진 때라서 두 군수뇌부의 경질은 언론에서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군내부와 평소 군부 움직임에 관심을 둬왔던 정치권인사들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라며 YS의 군개혁 후속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한동안 「군(軍) 물갈이 깜짝쇼」의 속편상영에 뜸을 들이던 YS는 3주여만인 4월2일 기무사와 함께 군의 「실세3사(實勢三司)」로 불리는 수방사와 특전사 사령관을 일거에 갈아치웠다. 강성 하나회로 알려진 안병호(安秉浩·육사20기) 수방사령관과 김형선(金炯璇·육사19기) 특전사령관을 보직해임하고, 후임에 비하나회원인 도일규(都日圭·육사20기) 한미연합사 부참모장과 장창규(張昶珪·육사21기) 육본동원참모부장을 각각 임명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날 「하나회명단 살포사건」이 일어난다.
당시 국방부 국장으로 재직했던 예비역 B장군의 증언. 『수방사령관 등의 경질인사도 권영해(權寧海) 국방 장관이 일방적으로 청와대에 불려가 통보받는 형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로써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 수방사령관, 특전사령관 등 육군의 핵심라인이 YS군맥으로 완전히 물갈이된 셈이지요. 그러나 육참총장과 「실세3사」사령관 등을 물갈이한 것은 상징적 의미밖에 없었습니다. 아직도 군에는 소장급 이상만해도 20여명에 가까운 하나회 장성들이 곳곳에 포진한데다 영관급 하나회 장교들도 육본과 국방부, 합참의 주요보직을 독차지하고 있어, 장교인사와 주요정책이 이들에 의해 좌지우지될 가능성이 상존했습니다. 권장관 등을 중심으로 한 「신한국군」 실세들은 하나회를 뿌리째 뽑아낼 어떤 좋은 계기가 없을까하고 목하 고민중이었습니다』
4월2일 영관장교들이 주로 거주하는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 군인아파트. 출근길의 장교들은 승용차 앞유리 와이퍼에 끼워져있는 16절지 크기의 유인물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말로만 듣던 육사20기부터 36기까지의 「하나회명단」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유인물이었다. 이에 앞서 그해 1월 모월간지에 육사11기부터 26기까지의 하나회 명단이 실린 적이 있었으나 모두가 장성급이었고 아직 하나회정권이 득세하던 때여서 별다른 반향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 명단은 영관장교까지 망라돼 있는데다 한창 「하나회정리」문제가 군개혁의 화두였던 시점을 택했고, 더구나 군인아파트에 살포됐다는 점에서 삽시간에 군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불과 이틀도 지나지않아 국방부와 합참에는 유인물사본이 나돌았고 계룡대와 야전군사령부에서도 복사본을 구해달라는 요청이 국방부 등에 빗발쳤다.
명단에는 ▲20기 8명(2명 전역, 1명 사망) ▲21기 7명(2명 전역) ▲22기 8명(2명 전역) ▲23기 7명 ▲24기 7명 ▲25기 10명(1명 전역) ▲26기 8명 ▲27기 8명 ▲28기 9명 ▲30기 9명 ▲31기 7명 ▲32기 11명 ▲34기 8명 ▲35기 8명 ▲36기 7명 등 모두 142명의 이름이 타자기로 인쇄돼 있었다. 이 명단에 오른 장성들은 대부분 장군 1차진급자들로 국방부, 합참, 육본 등의 핵심보직이나 사단·군단장 보직을 맡고있고 영관장교의 경우도 청와대와 수방사, 기무사 등 핵심부대와 주요 정책분야 보직에 포진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군내부가 동요하고 언론이 명단살포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자 육군 수뇌부는 즉시 군수사기관을 동원, 진상조사에 나섰다.
수사의 초점은 살포자의 정체와 명단의 진위여부로 맞춰졌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육군수뇌부는 후자에 무게를 두고 수사를 벌였다. 수사과정에서 우여곡절도 발생했다. 수사책임자인 채문기(蔡文基) 육군범죄수사단장이 육사24기 하나회명단에 들어있었던 것. 채단장은 92년말 정기인사에서 헌병병과의 격년제 진급관행을 깨고 준장에 진급하는 등 인사구설수에 올랐던 인물이었다. 육군은 처음 범수단에 수사를 맡겼다가 육본법무감실과 합동으로 수사를 담당하도록 했다. 한때 기세등등하던 하나회 장군들중 일부는 계룡대 수사본부에 불려가 인격적 모독을 당하는 등 말못할 고초를 겪기도 했다.
하나회 실체를 확인하는 수사가 진행되던 중 4월16일 육군교육사 소속 백승도(白承道·육사31기) 대령이 『내가 뿌렸다』며 자수함으로써 사태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그러나 육군은 수사결과 발표를 차일피일 미루더니 5월10일에야 최종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수사를 맡았던 이상도(李相道·육사23기) 육본 법무감은 『명단에 게재된 142명 가운데 현역 13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장성 46명중 43명이 하나회원임을 시인하는 등 79.5%인 105명이 하나회원임이 확인됐으며 나머지 27명은 하나회와 관련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며 『비하나회원 27명의 명단은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발표했다. 이법무감은 이어 『이번 사건은 백대령의 단독범행으로 배후는 없으며 백대령이 육군내 사조직비리를 제거하겠다는 순수한 동기에서 하나회 명단을 작성, 유포한 뒤 자수한 점등을 참작해 기소유예 처분키로 했다』고 밝혔다. 군이 처음으로 군내 사조직의 실체를 공식시인하는 순간이었다.
이상도 법무감(현 변호사개업)의 증언.
『조사과정에서 대부분의 장군들은 선선히 회원임을 시인했으나 영관장교들은 부인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마도 육사 30기이후 기수들은 선배들에게 일방적으로 낙점당해 회원이 된 경우가 많아서였던 것 같습니다. 부인하는 경우는 동기생들의 평가와 근무경력 등 여러 정황을 따져서 확인했으나 27명은 끝내 확인이 불가능했습니다. 비하나회원으로 밝혀진 27명의 명단을 발표하지는 않았으나 인사참모부에 넘겨 존안자료로 쓰도록 했습니다』
수사발표후 권영해 장관은 하나회원 모두를 보직해임시키는 등 「하나회원 싹쓸이」를 추진하려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관련참모들이 법률적으로 하자가 있다고 이의를 제기한데다 일거에 단죄할 경우 빚어질 집단행동이 우려돼 인사관리를 통해 차근차근 정리해가는 「목죄기」전법으로 바뀐다.
이어지는 이법무감의 말.
『권장관은 하나회원 모두를 보직해임시키자는 초강경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회원들에게 적용될 사조직결성 금지조항은 이미 공소시효 3년을 넘긴 상태여서 문제가 많다고 판단, 현직(現職)의 임기가 끝나는 대로 차례로 조치하는게 좋다고 건의했습니다. 권장관도 다소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이에따라 군당국은 하나회원들에 대한 특별 보직관리에 들어가 문민정부 내내 승진과 보직에서 철저한 불이익을 주게된다.
유인물 살포사건 수사가 진행되던 와중에 단행된 4월15일 정기인사에서 하나회 정예멤버였던 최승우(崔昇佑·육사21기) 인사참모부장, 전영진(全寧鎭·육사21기) 국방부 인사국장 등이 각각 교육사 참모장과 제병협동본부장으로, 권중원(權重源·육사24기) 장관보좌관이 학생군사학교 참모장등으로 좌천됐다. 또 영관장교의 경우도 수방사 30단장, 기무사 501부대장등이 전방부대 부사단장으로 전출되는등 그후 단행된 서너차례의 정기인사를 통해 주요 핵심보직에서 하나회원들은 「부사령관, 부연대장, 부대대장」등 소위 「부(副)」자가 붙은 한직으로 내쫓겼다.
하나회원 명단 살포사건은 하나회척결의 계기만을 엿보던 문민정부에는 「울고싶은 아이 뺨 때려준」격이었던 것이다.<윤승용·유성식 기자>윤승용·유성식>
◎白 대령 단독행동이었나/軍내부에 배후세력說 파다/노태우계 충청인맥 거사說/장본인 처벌없이 승승장구
「하나회 거세작전」의 분수령이 되었던 백승도(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 육군담당관) 대령의 「하나회 명단살포 사건」은 과연 백대령의 단독행동이었는가?
당시 군수사당국은 『백대령의 단독범행』이며 『명단은 백대령이 이진삼(李鎭三) 육참총장의 행정부관으로 근무하던 91년 7월 동빙고동 자신의 아파트 틈새에 누군가가 「참모총장에게 전해달라」는 메모와 함께 밀어넣어 줘 입수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 군내부에는 배후세력이 있을 것이라는 설이 파다했다.
하나회 출신 예비역 C모장군의 증언. 『6공 들어서면서 전두환(全斗煥) 계열의 TK하나회와 노태우(盧泰愚) 계열의 「9·9인맥(9공수여단·9사단출신)」은 질시가 심했습니다. 특히 노태우 계열중에서도 L모 전육참총장을 필두로 충청인맥이 중심이 된 그룹은 YS정권 출범과 동시에 TK하나회세력을 제거하고 그틈을 자신의 세력으로 대체하려했습니다. 이를 위해 과거 자신이 데리고 있던 백대령 등을 부추겨 거사토록 했습니다. 이들은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일부러 자기 멤버 일부를 명단에 끼워넣는 등 고도의 전술을 구사했지요. 더구나 백대령이 자수하기 전날 모호텔에서 도일규(都日圭) 당시 수방사령관을 만났던 사실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이 그룹은 또다른 사조직인 「만나회」를 결성해 YS 군부를 좌지우지했습니다』
이에 대해 최근까지 언론과의 접촉을 피해왔던 백대령은 이번에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당초 발표대로 배후는 없습니다. 다만 내가 직접 살포하지는 않았습니다. 살포 전날 대전에 있는 교육사에서 새벽 1시까지 송별회식을 했고 이어 평소처럼 새벽기도회를 다녀왔기때문에 서울을 왔다갈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명단은 뜻을 같이하는 후배장교가 대신 뿌린 것입니다. 수사기관이 엉뚱한 동료들을 의심하기에 명단작성에 관여한 입장에서 모든 것을 혼자 감수하기 위해 자수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백대령은 이 사건으로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을 뿐아니라 그후 별다른 인사 불이익도 받지 않은 채 연대장 등을 지냈으며 DJ정권에서는 청와대까지 입성하는 등 승승장구해 문민정부 신(新)실세들이 뒤를 봐줬다는 구설수에 계속 시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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