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山커넥션’ 권영해 파격발탁/‘무명’ 權씨 현철장인 통해 상도동 접근… 탁월한 보고능력 발휘/장관시절 기무사정보 대통령보고前 현철씨에 전달 ‘입지강화’/하나회 척결뒤 불명예 퇴진… 안기부장 ‘부활’ 軍人事 주물러『사람을 참 잘 골랐어. 그 사람 덕에 내가 한 건 했지. 장관중에 최고야』 93년 여름의 어느 날 저녁 청와대. 취기가 오른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은 연신 칭찬을 계속했다. 그의 경남중·고 동기생 모임인 「삼수회」 멤버들과 함께한 자리였다. 김대통령은 시중 여론을 청취한다는 취지로 취임후 1년여 동안 매월 세째주 수요일에 이들을 청와대로 불러 술을 함께하며 노래도 불렀다. 그날 저녁 김대통령이 지칭한 사람은 권영해(權寧海) 국방장관이고, 「한 건」은 이른바 군개혁이었다.
문민정부 출범후 150일동안 숨가쁘게 진행된 「숙군(肅軍)작업」은 권장관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그는 군개혁 프로그램을 성안하고 앞장서 실행에 옮긴 대통령의 핵심참모이자 선봉장이었다. 김대통령은 권장관의 활약에 늘 흡족해 했고, 그에게 절대적 힘을 실어 주었다. 구여권 고위급 인사 K(현 한나라당 의원)씨의 전언. 『권장관은 문민정부 초대 내각에서 김대통령과 가장 많은 독대를 한 인사였습니다. 하루에 두차례나 청와대에 호출된 적도 있어요. 5·6공 시절에는 국방장관 보고때 외교안보수석과 경호실장이 배석했지만 권장관의 보고는 대부분 독대로 이뤄졌습니다. 김덕(金悳) 안기부장도 권장관만큼 자주 대통령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YS의 절대적 신임. 그것은 과연 어디에서 나왔을까. 당시 청와대 관계자의 상당수는 권씨의 「탁월한」 보고스타일 및 「면밀한」 업무처리 능력을 꼽는다. 김영삼 전대통령의 수행실장을 지낸 김기수(金基洙)씨의 증언.
『김대통령이 권장관과 첫 대면한 것은 14대 대선직후인 93년 1월초 하얏트호텔에서 였습니다. 이 무렵 김대통령은 각료감으로 찍어둔 인사들을 차례로 불러 해당분야의 문제점과 개혁방향을 물었어요. 일종의 면접시험이었지요. 그런데 권장관은 군더더기 하나없이 매끄럽게 답변을 한 것 같아요. 면담후 김대통령은 「그 사람, 괜찮구먼」이라며 매료된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그를 폄하하는 사람들도 그의 업무능력에 대해선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권씨는 군생활에서도 야전 지휘관보다는 참모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88년 서울올림픽 지원사령관을 마지막으로 육군소장으로 예편과 동시에 오자복(吳滋福) 국방장관에 의해 국방부 기획관리실장으로 발탁되고 2년후 차관으로 승진한 것도 그의 「꼼꼼하고 합리적인」 실무능력 덕분이었다는 평가다.
하지만 그것 뿐이었을까. 단지 업무능력만으로 국방차관이 하루아침에 군총수에 기용되고, 대통령의 엄청난 신임을 얻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아무래도 미흡하다. 당시 국방차관은 국방장관, 합참의장, 각군 총장과 연합사 부사령관, 합참1차장, 그리고 육군의 1·2·3군 사령관에 이은 군의전 서열 11위에 지나지 않았다. 또 권씨는 「잘 나가던」 PK출신도 아니다.(그는 경북 경주출신이다)
여기서부터 상도동진영과 권씨의 「사전 커넥션」의혹이 제기된다. 실제로 YS 측근과 군정보 관계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권씨가 92년 12월 14대 대선이전부터 YS측과 선을 댄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YS 진영은 수십년간 야당만 해온 탓에 딱히 군인맥이라는 것이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YS가 민자당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후 경남고 동문인 김광석(金光石) 전 청와대경호실장(당시 육군대학총장), 이병태(李炳台) 전 국방장관(〃 하와이 총영사) 정도가 상도동캠프에 알려져 있었다. 뒤집어 말하면 상도동이 정권교체기에 줄을 대려는 군장성들에게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는 얘기다. 권장관도 적극적으로 상도동 캠프에 접근했다.
당시 상도동측 관계자 Q씨의 증언. 『92년 권씨는 국방차관 시절 같은 가락동 Y아파트에 살던 윤모 예비역소장을 통해 YS인맥인 미국방송사 한국책임자 Y씨를 알게 됐습니다. 윤씨가 「권영해 국방차관이 꽤 쓸만하다」며 Y씨에게 권씨를 소개시킨 겁니다. Y씨는 현철씨 장인인 김웅세(金雄世) 롯데월드사장과도 절친한 관계였어요. 얼마후 Y씨는 김웅세씨를 통해 상도동에 권씨를 소개했습니다. 이때 권씨가 처음 만난 사람이 바로 김현철(金賢哲)씨입니다. 이때를 전후해 국군중앙교회에 다니던 권씨의 부인이 YS가 장로로 있던 충현교회로 옮겨 손명순(孫命順) 여사를 극진히 모셨습니다. 한마디로 권씨는 YS의 마음을 사기위해 온갖 방법과 채널을 동원, 주도면밀하게 접근했다고 보면 됩니다』
구여권의 고위직을 지낸 한나라당 의원 S씨의 얘기도 이와 다르지 않다. 『조각때 청와대에서도 무명인 권씨의 장관발탁이 단연 화제였는데, 권씨가 김웅세씨의 추천을 받았다는 정보가 민정비서관실에 접수됐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군개혁의 명분강화를 위해 장관인사에서 부터 「파격」이 필요했던 YS로서도 권씨가 적절한 카드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권씨는 장관취임후에도 정권내 입지강화를 위해 상도동과의 비선을 적극 활용했다. 이를 위한 핵심채널은 현철씨.
당시 군 사정에 정통한 예비역장성 A씨는 권씨와 현철씨간에 「정보커넥션」이 가동됐다고 주장했다. 『권장관은 기무사에서 정보보고가 올라오면 반드시 대통령보고에 앞서 사본을 만들어 김기섭 전안기부 기조실장 등을 통해 현철씨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러니 안기부정보까지 갖고 있던 현철씨가 대통령에게 올리는 정보가 얼마나 정확했겠어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신뢰는 커져만 가고, 권장관은 이런 커넥션 덕분에 승승장구했던 거죠』
사실 권력핵심부, 특히 현철씨와의 특수관계가 아니고서는 「능력있는 관료」에 불과했던 권씨의 「벼락출세」를 설명하기 어렵다.
권씨는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국방장관때는 물론 안기부장으로 재직하면서도 장성급 인사에까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 한때 군의 「대부(代父)」라는 말도 나돌았다. 청와대 민정비서관출신 K씨의 증언. 『이양호(李養鎬) 국방장관시절 장관이 대통령에게 올린 인사안이 뒤집어진 적이 몇번 있었어요. 공교롭게 당시 권안기부장이 대통령과 청와대 독대후 호텔안가에서 자신과 가까운 장성들을 만나는 광경이 자주 목격됐습니다. 자연 진급에서 탈락한 예비역 장성들 사이에 권씨에 대한 원성이 높아졌죠』
95년 전역한 예비역장성 C씨는 『문민정부 마지막 1년간 장성급 요직인선은 대통령도, 현철씨도 아닌 「권영해인사」였다. 그의 몸은 안기부에 있었지만 시선은 국방부로 향해있었다』고 말했다.
하나회척결로 상징되는 군개혁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던 권씨는 93년 12월20일 뜻밖의 사건으로 국방장관직에서 물러나는 좌절을 경험한다. 국방부 군수본부가 프랑스 무기거래상의 가짜 선적서류에 속아 선적도 하지않은 무기 대금으로 670만달러를 지불한 소위 「포탄사기 사건」이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씨는 불과 한달여만에 KBO총재로 공직에 복귀했고, KBO총재 재임중에도 YS와 현철씨를 수차례 비밀독대를 할 정도로 은밀한 관계를 지속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권씨의 군출신답지 않은 정치성과 출세욕은 현철씨의 야심과 맞물리면서 문민정부 군개혁이 하나회 숙정 이후 엉뚱한 방향으로 왜곡·변질되는 결정적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하나회의 자리를 메운 「1·5군맥」「PK점령군」「경복고·고려대 인맥」 등 새로운 파벌의 등장은 이런 과정에서 비롯된 필연적 부산물이었던 것이다.<윤승용·유성식 기자>윤승용·유성식>
◎권영해 누구인가/중도적 처신으로 신분상승/“軍개혁 없이 사람만 바꿨다”/문민 첫 국방업적 평가 인색
권영해 전국방장관을 잘 아는 사람들은 맨 먼저 그의 능란한 화술과 유연한 처신을 떠올린다. 군출신으로는 드물게 정치색채가 짙었다는 얘기다.
권씨는 경주고를 졸업한 TK출신이면서도 하나회에 끼지 못했지만, 결코 하나회와도 담을 쌓지않았다. 하나회출신 예비역장성 A씨는 『권씨는 하나회멤버들과 회동하거나 모임의 살림살이에도 관여하는 등 일정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말했다. 동시에 육사출신(15기)이면서 비육사출신들과도 상당한 교분을 맺었다. 대표적 인사가 그를 국방부 기획관리실장으로 발탁한 오자복(吳滋福) 전 국방장관(갑종 3기). 어느 쪽에도 모가 나지 않은 중도적 처신을 하면서 신분상승 욕구를 채웠던 셈이다.
이런 스타일의 연원은 그의 군경력에서 유추할 수 있다. 육사 15기 동기생 176명중 20등 안팎의 성적으로 졸업한 권씨는 이진삼(李鎭三) 고명승(高明昇) 민병돈(閔丙敦)씨 등 하나회소속 동기생들의 그늘에 가려 항상 2차로 진급하는 설움을 맛봤다. 결국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는 과정에서 권씨는 이같은 「생존 노하우」를 체득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권씨는 권력자들에게는 철저한 「예스맨」으로 통했다. 군개혁을 기획하고 집행한 총책임자로서 청와대 등 권력핵심부의 의중과 정치논리에 시종 충실했다는게 군관계자들의 지배적 평가다.
『권장관은 문민정부의 첫 국방총수로서 군사정부에서 누적돼온 군의 구조적 문제점, 즉 국방예산 편성 및 집행의 비효율성, 비민주적 부대운영 등을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지만 이에대한 소신과 철학없이 정치권의 주문에만 끌려다녔다. 그는 탁월한 언변으로 김영삼대통령을 기쁘게 했을 지는 모르지만 실제 한 일이라곤 나쁜 관행과 제도는 그대로 둔 채 사람을 바꾼 것 뿐이다』 그에 대한 군내부의 평가는 이처럼 인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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