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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절망을 넘어설 참용기/白基玩 통일문제연구소장(특별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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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절망을 넘어설 참용기/白基玩 통일문제연구소장(특별기고)

입력
1998.04.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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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0년대 중반 군사독재가 한참 기승을 부려 앞이 안보일 적이다. 나는 더욱 컴컴한 명동 뒷골목에서 우리 겨레의 위대한 서사시 장산곶매의 부리질 이야기를 자주 했었는데 그리되면 술은 거의 공으로 먹는 수가 많았다. 주변에 토끼 따위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일년에 한두번 저 끝없는 대륙 우랄산을 넘고 또 넘어 사냥을 떠나기 전날 밤 장산곶매는 부리질을 한다. 딱, 딱.왜 그랬을까. 온몸으로 사냥에 나서려면 집에 대한 집착부터 떨구려 제 둥지를 부수는 소리요, 캄캄한 밤을 쪼아 길을 내는 소리이니 오늘 우리네 몸짓도 붓놀림도 이와같이 이 밤을 부수는 부리질이라야 한다고 피를 토하면 다방 아주머니가 찻값을 다 안받기도 했었다.

세월은 흘러 40년, 요즈음은 노조나 학교 또는 교회에서도 오늘의 이 절망을 넘어설 용기 희망의 이야기를 해달라는 주문을 자주 받는다. 어림이 가는 이야기다. 날마다 실업자는 만명씩 늘어나고 무너지는 중소기업은 하루 수백개, 떵떵거리던 재벌들은 흡수통합 대상의 초라니인데도 앞이 안보이니 그런 주문도 있을 법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오늘의 경제회복 노력은 문제의 설정부터가 잘못돼 절망을 더욱 깊게 하고 있다. 첫째 오늘의 이 어려움은 단순한 경제파탄인가. 아니다. 사실은 국제 독점자본에 의한 피해상황이다. 외채에 대한 올해 이자만 약 150억달러, 그런데 30대 재벌의 매출액 대비 이윤율이, 오메 0.3%이니 도대체 어떻게 갚느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성실하게 일을 해도 안되고 착하게 마음먹어도 안되고 오로지 돈이 있어야 하는 상황이다. 가치관의 전환이 없고선 이 절망을 넘어설 용기가 날 수 없는 것이다.

두번째로 어떤 것이 경제회복이냐는데 대한 실체를 제시하지 못하는 데서 절망은 자꾸 깊어가고 있다고 본다. 도대체 경제회복이란 무엇인가 이말이다. 국민의 피와 땀, 민족경제의 무제한의 희생으로 재벌들이 진 빚을 갚는 것인가. 아니다. 돈이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주인인 세상, 그리하여 일을 하는 사람이 살 수가 있고 착한 사람이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참된 경제회복이라는 명제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없는 것이 오늘의 절망의 본질인 것이다.

세번째로 지금껏 경제건설의 주역은 망치와 붓을 든 일꾼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거리로 내몰고 대신 더 많은 외채, 외래인 투자만이 경제회생의 주역인양 떠드는 것은 이들에게 절망을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어지고 있는가. 신바람은 없고 절망의 어두운 그림자만 덮쳐 오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러나 우리는 절망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간이」의 전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간이라니 무슨 말일까. 말 그대로 일에 치이고 매에 치여 온 몸이 나간 사람이다. 두 무릎은 세울 수가 없고 허리는 펼 수가 없으며 목은 붙어 한치 앞을 갈 수가 없는 사람, 바로 우리들이다. 그러나 주저 앉으면 죽는다. 왜냐, 저 멀리엔 우리들이 흘린 땀의 열매가 빛나고 있기에 그것을 찾으러 나가야 한다. 그러니까 닥친 비극을 비가(悲歌)투로 자조하는 것이 아니라 비장성으로 승화시키는, 꿈을 실체화하는 사람이 나간이다.

그렇다 우리 모두 나간이의 전통을 오늘에 살리자 이말이다. 세계는 방향을 잃고 좌절하지만 비극을 비장성으로 승화시키는 신화, 그 창조의 주인공은 바로 한반도의 우리들이라는 신화를 만들자 이말이다. 거덜난 우리가 중심이지 돈이 중심이 아니다. 그렇다. 한발자국 한발자국 나아가는 우리들의 머리위에 이 밤을 부수어 길을 내는 부리질이 있어야 한다. 딱,딱. 아 세기의 서사시 부리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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