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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화는 사실상 이미 개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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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화는 사실상 이미 개방되었다

입력
1998.04.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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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러칼라셔츠·왕발운동화 촌티패션에/일본음악·만화를 즐기는 젊은이들에게그는 지금 서울 압구정동의 일본만화카페로 향하고 있다. 짧게 깎은 염색 머리. 그 위에 얹힌 노랑알 선글래스. 알록달록한 꽃무늬 프린트 셔츠와 착 달라붙는 나팔바지에 큼직한 운동화. 머리부터 발끝까지 복고 분위기가 줄줄 흐르는 「촌티패션」이다. 귀에 꽂힌 이어폰에서는 일본 록그룹 「엑스재팬」이 나오고 있다. 취미는 「재패니메이션(Japanimation)」 비디오 테이프 수집이고 좋아하는 음식은 주먹밥(오니기리)과 우동. 그는 20대 초반의 「어린 친일파」다.

「일본마니아」들이 넘쳐난다. 그들은 젊다. 해방의 벅찬 기억도, 전쟁의 쓰라린 아픔도, 군사정권시대의 울분도, 개발시대의 근면함도 모른다. 일본 방송을 본뜬 TV 프로그램을 보며 말을 배웠고, 일본 만화인 「미래소년 코난」과 「슬램 덩크」를 보며 꿈을 키웠다. 인터넷, 위성방송 등 현란한 미디어를 타고 밀려드는 정보의 폭풍에 익숙한 그들에게 일본은 이웃나라일 뿐이다.

『미국에서 들어온 힙합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면서 「일본만은 안된다」는 것은 이상해요. 일본이라고 무작정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취향이 그쪽이니까 좋아하죠. 일본 패션은 좀 튀잖아요. 전 그런 거 좋아해요. 구제품(중고)이 많으니까 값도 싸고…』 서울 Y여고 2년 김화정(17)양은 일본 패션잡지 「논노」 「유행통신」 등을 뒤져 패션 아이템을 찾아내는 「일본풍 멋쟁이」다. 한동안 루스 삭스(무릎까지 오는 헐렁한 양말)가 유행했는데, 요즘은 세일러 칼라 셔츠와 큼직한 사이즈의 날렵한 운동화가 인기품목이다. 힙합은 별로다. 역시 일본풍 복고가 입맛에 맞는다.

서울 H고 3년 최동헌(18)군. 일본 애니메이션의 팬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이웃의 토토로」, 오토모 가쓰히로 감독의 「아키라」 등을 좋아한다. PC통신을 통해 9,000∼1만원에 비디오테이프를 구한다. 「파이널 판타지」시리즈 등 일본 게임에도 빠져 있다. 『개방이 안 됐다고 해도 다 구할 수 있어요.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안 본 친구가 오히려 드물어요. 정식 수입이 아니기 때문에 업자들도 폭리를 취하고 부작용도 많아요. 이웃나라로서 당연한 문화 교류일 뿐인데…, 개방이 발전에 더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들에게 일본문화 개방 논란은 별 의미가 없다. 일본 문화는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는 가까운 존재다.

실제로 일본 비주얼 록의 대표주자 「엑스재팬」은 공중파 방송을 탄 적이 없는데도 우리나라에서 30만장 이상(비공식집계)의 매출고를 올렸다. 여가수 아무로 나미에, 인기만화 「슬램 덩크」의 주제곡을 부른 그룹 「자드」 등도 중고생 사이에는 인기인. 마니아가 아니어도 그들의 노래 한두곡은 들어본 경우가 많다.

PC통신 하이텔의 일본가요연구회 대표 시삽(Sysop:System Operator의 줄임말) 이제헌(24)씨. 그의 취미는 「일음(일본음악의 줄임말)」 감상이다. 매달 일본가수나 그룹의 CD를 사는 데 30여만원을 들이는 마니아다. 고교 때 친구의 소개로 「일음」에 입문했다. 듣기에 편하고 장르도 다양한 일본의 대중음악을 좋아하다 보니 전문가 수준까지 갔다. 『일음이 대단한 것은 아니죠. 그런 스타일을 좋아할 뿐이지 「일본이기 때문에」라는 특별한 감정은 없어요. 문호가 개방된다고 갑자기 팬이 늘어 나지도 않을 겁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CD나 음악 잡지를 구해요. 종종 「금지된 것」이라는 호기심 때문에 관심을 갖는 친구들도 있죠』

「금지됐다」는 현실은 곳곳에 「친일의 해방구」를 만들어 냈다. 서울 압구정동, 이대 입구 구제품골목, 동대문 광장시장 등은 일본파 멋쟁이들의 메카이다. 일본에서 수입된 중고 의류를 팔면 「튀는」 가게로 통한다. 패션 잡지에서도 앞다투어 소개한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나이스 클랍」「오조크」「다반」「안전지대」 등 일본풍이 물씬한 수입 브랜드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서울 명동 중국대사관 근처는 일본 잡지, 사진집, 화보집, 비디오테이프, CD 등이 모여드는 곳으로 유명하다. 90년대초까지만 해도 회현지하상가의 H레코드 등 일본문화의 집결지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강남역 S사 등 전문가게 뿐 아니라 청계천 도깨비시장, 용산전자상가 등 대만제 복제품을 취급하는 곳까지 수없이 생겨 났다. 부산의 B사 Y사, 대전 B사, 광주 S사 등도 일본 CD 비디오테이프 잡지등이 수혈되는 창구. 서울 등 대도시에는 일본 만화로 특화한 북카페, 일본가요 전문노래방도 있다.

이들의 문화적 「친일」이 역사·정치적 「친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만화를 좋아한다는 K전문대 심수연(22·여)씨. 『일본에 대한 기성세대의 반감은 남의 일같이 느껴질 때도 있어요. 물론 독도나 정신대, 과거사 등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의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런 것이 문화적 폐쇄나 편협성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기성세대가 개방찬반론으로 후끈 달아있는 동안에도 이들은 이미 일본 문화를 흠뻑 섭취하고 있다. 얼마나 소화하고 있을까는 다른 문제이다. 이 곳은 문화가인가, 친일지대인가.<김경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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