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小山측 후계자문제 ‘金心도 제조’(문민정부 5년:12)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小山측 후계자문제 ‘金心도 제조’(문민정부 5년:12)

입력
1998.04.13 00:00
0 0

◎청와대내 소장그룹 “민주계 불가론 이어 이회창 불가론” 전파/현철, 이회창씨 대표내정 소식에 탁자유리 내려쳐 병원行/‘金心시비’ 이홍구·이수성 거쳐 이인제로 환생했다 사라져김영삼(金泳三) 대통령 집권후반기 청와대 내엔 김심(金心·김대통령의 의중) 「제조공장」이 있었다. 후계자 문제를 둘러싸고 나돌았던 각종 김심의 상당량은 이곳 제품이었다. 청와대내의 「후기 민주계 여론」도 대부분 이곳이 제조처였다. 이 공장의 간부사원은 김현철(金賢哲)씨와 이원종(李源宗) 정무수석의 주위에 포진했던 청와대내 소장비서 그룹. 이들은 YS 집권후반기에 민주계 「올드 멤버」들이 청와대를 빠져나간 뒤 더욱 위세를 떨쳤다. 현철씨와 이수석에 대한 YS의 의존도가 한층 높아지는 바람에, 위로부터 흘러내린 권력의 낙수(落水)를 덤으로 향유한 셈이었다.

현철씨 또래인 K모비서관과 P모비서관이 주축이 돼 전파했던 최초형태의 김심은 『민주계 대선주자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당시만해도 이들이 전달한 김심은 있는 그대로의 YS 의중이었다. YS와 현철씨는 96년 4·11총선후 시작된 신한국당 차기대권 레이스를 지켜보면서 민주계 대선주자 배제원칙을 굳히게 된다. 민주계 대선후보로는 정권재창출이 불가능할 뿐더러, 민주계가 당내경쟁에 나설 경우 후보경선 자체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이즈음부터 신한국당 주변에 나돌기 시작한 「민주계 불가론」은 경선의 불공정성 시비를 원천차단하는 동시에, 최형우(崔炯佑)·김덕룡(金德龍) 의원 등 민주계 경선주자들을 주저앉히기 위한 사전정지 작업이었다. 홍인길(洪仁吉) 의원이 96년 7월 청와대에서 YS를 독대하고 나온 뒤 퍼뜨렸던 『최형우·김덕룡은(대선주자) 아니다』는 이야기도 같은 맥락이었다. 민주계 불가론은 최·김 두 의원과 그들의 핵심계보를 제외한 상당수 민주계의 공감을 얻었다.

하지만 정작 김심의 정체를 둘러싸고 민주계의 혼란과 내분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이회창(李會昌)불가론」이 청와대로부터 흘러나오면서부터였다. 민주계 의원 Q씨의 이야기.

『민주계 불가론에 뒤이어 나온 것이 이회창 불가론이었습니다. 현철씨와 이원종수석 휘하의 비서관들이 사적으로 신한국당 인사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김심은 이회창이 아닌 것 같다」는 이야기를 유포했습니다. 이것 자체가 조작됐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YS는 차기문제와 관련, 민주계 의원들과의 독대자리에서 「알아서 하라」고 말하면서도 이회창씨에 대해선 왠지 내키지 않는 듯한 느낌을 주었던 게 사실입니다. 자의적인 해석이 가능토록 했던 것이죠. 이회창씨에 대한 현철씨의 생각을 정확하게 알고 있던 김심 전파담당 비서관들이 이 공간을 「반(反)이회창」으로 몰아갔던 겁니다』

「비민주계­반이회창」으로 요약됐던 「이들의」 김심은 상당기간 이홍구(李洪九)씨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다 97년초 노동법 날치기 통과와 그에이은 정국경색의 여파로 당대표인 이씨가 정치적 상처를 입게 되자 제3의 대안을 찾아 나서게 된다. 이홍구씨를 대신해 새롭게 떠오른 김심의 총아는 이수성(李壽成)씨였다. 3월4일 이수성씨가 국무총리직을 고건(高建)씨에게 물려줌과 동시에 신한국당 고문에 전격임명되자, 소문은 사실로 굳어지는 듯했다. 「김심=이수성」이란 등식은 그러나 3월10일 G남성클리닉원장 박경식(朴慶植)씨가 현철씨의 국정개입을 입증하는 비디오테이프를 폭로하면서 일단 수면 아래로 잠복하게 된다. YS는 박씨의 테이프 폭로로 정국이 혼미상태에 빠져들자 「이회창 당대표」란 위기돌파 카드를 꺼냈고, 이는 이회창대세론을 부르는 단초가 된다. 청와대비서관출신 Z씨의 회고.

『YS는 최형우씨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다음날인 3월12일 저녁 신한국당 중진들에게 이회창씨가 대표에 내정됐다는 사실을 통고해 줍니다. 중진들에게 연락이 가기 전 이 사실을 미리 알았던 현철씨는 이날밤 구기동 자택에서 술에 취한 채 탁자를 내려치다 유리에 손을 다쳐 병원에까지 가게 됩니다. 테이프 폭로에다 이회창씨의 대표 기용마저 겹치자 분을 삭이지 못했던 겁니다. 현철씨는 그러나 그 이후에도 이회창대세론에 승복하지 않았습니다』

현철씨가 구속수감(5월17일)된 이후에도 김심시비는 그치지 않았다. 반이회창 라인을 견지했던 민주계 중심의 정치발전협의회(정발협)는 부단히 김심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청와대의 김심 전파반은 이 상황을 유효적절하게 활용했다. 정발협은 애당초 김심을 떠나서는 존립할 수 없는 단체이기도 했다. YS가 김심시비 차단을 위해 활동중단 지시를 내리자마자 그날로 사실상 해체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정발협 핵심 발기인이었던 X씨의 이야기.

『정발협은 원래 이수성씨를 후보로 옹립하기 위해 결성된 단체였습니다. 「YS가 이수성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있다」는 청와대발(發) 통신이 정치권에 먹혀들어간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이수성씨의 여론지지도가 오르지 않고, YS가 애매한 태도로 다중플레이를 계속하자 정발협도 갈팡질팡하게 됐습니다. 그러다 YS의 활동중단 지시가 있게 되자 각자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져 버렸던 겁니다』

정발협은 산산이 흩어졌지만 정발협을 있게 한 김심은 이회창씨가 신한국당 후보가 된 뒤에도 악령처럼 되살아 난다. 아들 병역문제로 이회창씨의 지지도가 곤두박질하자 김심은 이인제(李仁濟)씨를 통해 환생하게 된다. 이인제씨의 대통령후보 독자출마와 신당창당을 둘러싸고 YS 지원설이 줄기차게 제기됐던 배경에는 청와대내 김심 전파역들이 있었다.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YS지원설은 이씨에겐 오히려 치명타가 되는 역의 결과를 낳고 말았지만.

YS 집권후반기 청와대내 민주계 여론과 김심 전파 임무를 맡았던 K씨와 P씨 등 소장비서관 그룹은 청와대 파행인사의 주역이기도 했다. 청와대 인사담당비서관을 번갈아 지냈던 이들은 현철씨가 이끌었던 대선 사조직인 나라사랑실천운동본부(나사본) 산하 청년사업단 멤버들인 C, K, K, S, C씨와 H, P, L씨 등과 서로 끌고 밀어주면서 인의 장막을 형성했다. 초대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박관용(朴寬用·한나라당 의원)씨의 이야기.

『현철씨 문제와 관련해선 비서실에서 어느 누구도 저에게 보고서를 올린 적이 없습니다. 정무수석실, 민정수석실, 총무수석실에 현철씨가 데리고 들어온 젊은 친구들이 빈틈없이 깔려 있었는데 누가 감히 현철씨에 관한 좋지 않은 보고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홍인길총무수석에게 「저러면 안된다. 주의 좀 줘라. 당신은 현철이와 한집안 사람 아니냐」고 여러 차례 충고했지만 도저히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의지를 갖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있고, 도저히 내 힘으로는 안되겠다고 판단되는 문제가 있는데, 현철씨 문제는 후자쪽이었습니다. 그만두고 물러나오는 도리밖에 없었습니다』

K씨와 P씨 등은 청와대의 범주를 넘어 공무원 인사에까지 개입했고, 정치자금 심부름을 하면서 떡고물을 챙기기도 했다. 정보근(鄭譜根)한보그룹회장 등 재벌 2세들과 어울려 강남 룸살롱을 휩쓸고 다니면서 발렌타인 30년짜리를 한꺼번에 9병까지 먹어치웠다는 「전설」을 남긴 청와대비서관들도 이들이었다. 「소산(小山)게이트」에 연루됐던 박태중(朴泰重)(주)심우회장, 이성호(李晟豪) 대호건설사장 등이 업계의 소산 그늘 세력이었다면, 이들은 청와대의 호가호위(狐假虎威)세력이었다.

현철씨는 그러나 진정한 리더는 되지 못했다. 그는 실제로 김기섭(金己燮·전 안기부운영차장)씨 이외에는 온전한 직계를 형성하지 못했다. Y씨와 K씨 등 마지막까지 그를 지켰던 몇몇 사람들은 오히려 권력의 부스러기 맛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이들중 한 명은 국회 청문회에 출석하는 현철씨의 길잡이 역할을 하다가 카메라 플래시에 이마가 찢기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그가 청문회장 복도바닥에 쏟았던 흥건한 피가 이들 그룹들이 토한 회한의 각혈은 아니었을까.

◎민주계의 현주소/상도동 찾는 발길 “뚝”/“들락거리면 오해만…”/사실상 ‘모래알 상태’

상도동 시절 YS 수행비서를, 문민정부 5년간 대통령수행실장을 지낸 김기수(金基洙)씨는 집권말 「홀로서기」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퇴임후 YS와 함께 상도동으로 돌아갈 비서관을 정하는 과정에서 그는 가까운 민주계 인사들에게 『나도 이제 50줄이다. 언제까지 YS비서관만 할 수는 없지 않느냐. 집사람도 더이상은 못참겠다고 난리다』며 방면(放免)을 호소했다. 김씨는 주변의 설득을 받아들여 결국 상도동비서관(1급) 자리로 되돌아갔지만, 주위사람 모두에게 안쓰러움과 씁쓸함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김씨의 상도동 벗어나기 시도는 YS를 주군으로 모셨던 민주계의 바뀐 정서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YS가 상도동에서 칩거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요즘 그를 찾는 민주계 인사들은 거의 없다. 물론 그럴듯한 이유는 있다. 딱히 YS를 만나야 할 현안이 없는데다, 괜스레 상도동에 출입해 봐야 「어른」에게 누만 끼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정계개편이네 뭐네해서 예민한 눈길이 쏠리고 있는 마당에 상도동을 들락거리면 오해만 산다는 논리다.

딴은 그렇기도 하고, 뿔뿔이 흩어진 민주계의 모래알 현주소를 보면 그 이상을 기대하기 어렵기도 하다. 서석재(徐錫宰) 김운환(金桓)씨는 여타 민주계와 결별해 국민신당에 가 있고, 김덕룡씨 계파와 서청원(徐淸源)씨 그룹은 부산·경남(PK) 민주계와는 별개로 한나라당 당권파와 중도파에 몸담고 있다. 최형우씨는 병환으로 사실상 정계은퇴 상태이고, 강삼재(姜三載)씨는 대선이후 은둔에 가까운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나마 한덩어리로 뭉쳐있던 한나라당 부산 민주계는 부산시장후보 인선과 차기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불협화음을 노정하고 있다. 한때 당내 다수파를 점했던 범(汎)민주계는 신한국당 경선과정을 거치면서 공중분해된지 오래다. YS의 영욕이상으로 십수년간 한솔밥을 먹어온 상도동 식구들도 극심한 부침을 겪고 있는셈이다.<홍희곤·김성호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