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때 읍내나갔다 일본군 꼬드김에 끌려가/黑龍江省 위안소서 10여년 ‘인간으로 못할짓’/해방되자 갈곳없어 전전 버섯따고 뗏목일도『63년간 품어온 울분을 풀도록 가족을 찾아 주세요』
문명금(文明今·81)할머니는 중국 정부가 위안부생활을 증언해달라는 요청에 이제껏 꿈쩍도 하지 않다가 모국조사팀의 방문에 눈물과 함께 애절한 사연을 털어놓으며 꿈에도 그리는 가족들을 만나게 해 달라고 애원했다.
할머니가 기억하는 고향은 경남 하동군 화심리. 하동읍에서 고개를 두개 넘어 첩첩산중 산골 초가집에 산 것으로 기억하는 문할머니는 찢어지게 가난해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할머니는 팔순이 넘는 나이답지 않게 『아버지 문치우씨와 어머니밑에 맏딸인 나와 여동생 명순, 명남, 남동생 길호 등 4남매가 있었다』고 가족들을 생생히 기억했다.
할머니는 18세때 하동읍내에 나갔다가 일본군인들에게 붙잡혀 『좋은 곳에 취직시켜주고 돈도 많이 벌게 해주겠다』며 꼬드기는 말에 군인들을 따라 나섰다. 할머니는 『부모님께 알리지도 않고 따라 나와 지금 이 신세가 됐다』며 울먹였다고 증언을 채록한 한국정신대연구소장 정진성(鄭鎭星·서울대 사회학과)교수와 나눔의 집 혜진(慧眞)스님은 전했다.
할머니는 기차를 갈아타며 한참 가다 중국 베이안(北安)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자동차에 올랐다. 자동차에는 많은 조선처녀들이 타고 있었다. 이들과 함께 헤이룽장(黑龍江)성 순우(孫吳)의 위안소로 들어갔다.
이 위안소에서 10여년을 지낸 할머니는 현재 중국 정부가 일본침략유적지로 보존하는 이곳을 지날 때마다 『지긋지긋하다』며 고개를 돌린다. 할머니를 돌보고 있는 재중동포 백옥란(白玉蘭·55)씨가 당시 얘기를 해달라고 조르면 할머니는 『인간으로서는 못할 짓이었다』며 『너희가 감히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느냐』고 치를 떤다.
일본군 장교들이 사용한 이 위안소에는 얼굴이 예쁘고 앳된 한국인 처녀 50여명이 위안부로 배치됐다. 위안부들이 말을 잘 듣지 않을 땐 근처에 있는 사병위안소로 불려가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일본군들이 하루에 수십명씩 몰려와 할머니는 다음날 아침에는 제대로 앉지도 못하는 고통을 겪을 정도로 일본군들의 성욕을 채워주는 도구로 전락했다.
할머니는 『아프지도 않은데 정기적으로 주사를 놓는 바람에 이후 결혼을 했으나 아이를 낳지 못했다』고 눈물을 흘렸다. 이 주사는 군대위안부출신 할머니들이 한결같이 증언하는 것으로 임신을 하지 못하도록 처방한 이른바 「606주사」로 보인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일본군이 철수하고 남은 위안부들도 뿔뿔이 흩어졌지만 할머니는 갈 곳이 없어 순우에서 혼자 살다 재중동포 윤방하(78년 사망)할아버지를 만났다. 윤할아버지와 혼인신고까지 한 뒤 순우에서 동북쪽 45㎞지점의 옌장(沿江) 조선족촌으로 찾아들어 버섯을 따고 뗏목일을 하며 생활했다.
윤씨가 사망한 뒤 5∼6년동안 혼자 살다 중국인 취(曲·79)씨를 만나 다시 순우로 돌아왔으나 밥을 못구할 정도로 굶주리다 올해초 현정부가 운영하는 경로당으로 옮겨와 재중동포 백씨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 할머니는 조사팀이 찾아오자 『조국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니 그동안의 설움과 울분이 한꺼번에 풀리는 것 같다』며 『하루빨리 고국에 살아있을 가족들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특별취재반>특별취재반>
◎친동생들 “죽은줄만 알았는데”
『죽은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살아있다니…』
문명금(文明今·81)할머니의 친동생으로 확인된 여동생 명순(明順·77·전남 여수시 미평동)씨는 이날 사진을 확인하고 『언니가 아버지 약값을 벌기위해 집을 나간줄로만 알았다』며 『언니 소식을 알아보고 싶었지만 형제들이 모두 글을 익히지 못해 편지 한 장 쓸 수도 받아 볼 수도 없었다』고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남동생 길호(吉鎬·70·부산 수영구 광안1동)씨도 『누님이 기억하는 가족사항이 우리와 정확히 일치한다』며 『눈매와 넓은 이마로 보아 누님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길호씨는 『누님과 소식이 끊긴이후 북한에 있는줄 알고 이산가족찾기방송이 나올 때마다 TV앞에 앉아 누님소식을 기다렸다』며 울먹였다. 문할머니의 부모는 이미 사망했고 4남매는 모두 생존해 있으며 문할머니가 기억하지 못하는 막내동생 칠금(67)씨도 서울에 살고 있다.
◎文할머니 기거 위안소/縣정부 「문물보호」 지정 보존
문명금할머니가 10년 넘게 생활했던 군대위안소는 중국 순우현 정부가 「문물보호단위」로 지정, 보존하고 있다.
이 건물은 할머니가 끌려간 35년 이전 러시아와의 전쟁을 위해 9만여명의 대부대를 주둔시키던 일본군이 만들었던 5곳의 위안소 중의 하나다. 2층 벽돌건물인 이 위안소의 1층은 술집 등 장교들의 위락시설로, 2층은 위안부들의 숙소로 사용됐다.
한국정신대연구소장 정진성교수는 『이 곳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쓰라린 역사가 깃들어 있는 곳』이라며 『중국 정부는 위안소를 영구보존하고 문할머니의 증언에 따라 현과학기술협회에 문할머니가 생활했던 장소를 재현해 일본군의 만행을 알릴 계획이라고 밝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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