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참석차 해외순방길에 나선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특별기내 간담회를 통해 『제일 큰 문제는 실업과 불경기다. 귀국후 국민이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할만한 대책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많은 국민들, 이미 120만명을 넘어선 실직자와 그 가족들은 대통령의 약속에 큰 기대를 걸었다.그러나 이규성(李揆成) 재정경제부장관은 6일 『7조9,000억원의 실업대책 재원이 마련된 상황에서 일단 이를 집행해가며 실업추이를 보는 게 중요하다』고 밝혀 획기적인 실업대책은 없음을 시사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정부가 놀랄만한 실업대책을 마련하기 어렵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실직자들이 목마르게 기다리는 실업대책을 놓고 이런 혼선을 빚는 것은 유감스런 일이다.
최근 실업대책과 관련한 정부와 여당의 처사를 보면 한심할 때가 많다. 부처마다 「한건주의」식으로 대책을 터뜨려 놓고 흐지부지하는가 하면 설익은 내용을 발표했다가 빈축을 사기도 한다. 오죽하면 국민회의가 10일 간부회의에 노동부장관을 배석시켜 실업관련 대책의 혼선을 질타했겠는가.
중앙부처는 마구 대책을 발표하지만 정작 일선행정 창구에는 지침이 내려오지 않아 실직자들을 헛걸음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전문지식이 필요한 황소개구리 알 제거나 박물관 유물 정리를 실직자들에게 맡기겠다는 탁상공론도 나왔고, 봉사의 성격이 강한 자율방범과 교통계도를 공공근로사업에 포함시켜 비판을 사고 있다. 정부는 실업대책 마련과 집행과정에서 좀 더 신중하고 세심해야 한다.
정부와 여당은 정직해야 한다. 정부의 지원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실업대책은 어디까지나 긴급구호조치이며 하루빨리 새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 최선의 실업대책이다. 우리 경제의 여건상 대기업과 금융기관의 부실 정리가 가장 시급한 과제이며 구조조정이 늦어지면 그만큼 새 일자리 마련이 늦어진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잘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야 한다.
최근 현대자동차등 대기업들이 생산직 인력감축 방침을 정하고 곧 노조와 협의를 벌일 것으로 전해진다. 대기업 구조조정에 따른 정리해고가 시작되어 본격적으로 실업자가 늘어날 것이라는 의미다.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근로자들이 실직의 아픔을 겪을 지 알 수 없는 이 위급한 시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노(勞) 사(社) 정(政)이 서로에 대해 최소한의 신뢰를 잃지 않는 것이다. 특히 정부의 실업대책이 절망에 빠진 실직자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다면 오늘의 위기를 헤쳐나가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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