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비스業’ 신념으로 회계업무에 새 바람/여성회계사중 최고참… ‘불모지’ 개척 자부심/“직업떠나 내 일처럼” 10년이상 거래업체 80곳/시어머니 함께 살며 살림솜씨도 전업주부 못잖아국내 여성공인회계사 113명 가운데 가장 고참인 노석미(40·노석미회계사무소)씨는 인터뷰요청을 마다하지 않는다. 나서기 좋아해서가 아니라 여성회계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여성에게는 불모지나 다름없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뒤 어렵게 개척한 길을 더 많은 후배들이 걸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대학의 요청으로 여대생 취업특강에 나설 때마다 하는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회계사는 숫자나 들여다 보고 기업의 절세를 도와주는 직업이 아니다. 숫자를 통해 기업상태를 파악하고 경영자문을 하는등 더 큰 경제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직업이다. 여성회계사가 많이 배출된다면 여성의 지위향상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는 여성회계사 1호가 아니다. 80년 그가 합격하기에 앞서 60년대에 3명이 이미 합격했지만 뉴스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그가 남자들도 선망하는 공인회계사시험에 합격했을 때도 축하보다 우려의 시선이 컸다. 합격하고 난 뒤 회계법인사무실에서 2년간 연수를 받아야 자격증이 주어지는데 어느 사무실에서도 여성을 채용하려 하지 않았다.
『합격자마다 회계사무실에서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는데 나에게는 어느 곳에서도 연락이 없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집에만 있다가 뒤늦게 삼일회계법인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회계사인 아버지(노희찬씨) 덕분이었다. 진로를 결정할 때에도 아버지는 미술을 전공하고 싶어 했던 그에게 남녀차별이 덜한 전문직을 권유했었다.
취직을 한 뒤에도 일을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선배들이 동료시보들을 감사대상 기업체에 데리고 가면서 그에게는 세미나자료를 챙기거나 자료정리를 시킬 뿐이었다. 간혹 기업에 감사를 나가더라도 경리담당 간부들의 못 미더워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이런 벽을 무너뜨린 것은 끈질김과 성실성. 그가 회계사 초년시절에 만나 계속 거래를 하고 있는 다국적 중전기제조업체 아세아 브라운 보베리(ABB)사의 정현정(44·여) 부사장은 『고객이 작은 이익에 집착하면 노석미씨는 「긴 안목에서 투자하라」고 조언할 만큼 남자 못지 않은 대범함과 판단력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여성으로서의 꼼꼼함과 고객에 대한 철저한 서비스정신은 남자동료들을 앞지를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회계사란 기본적으로 서비스직업」이라는 신조를 세운 그는 고객이 세무조사나 경영상의 어려움에 처할 때면 직업적인 책임한도를 떠나 자기의 일처럼 해결에 나선다. 『부지런하고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아버지를 닮았다』는 업계선배들의 칭찬이나 고객들의 신뢰가 노력한 대가로 주어졌다.
그러나 벽은 엄존했다. 86년 삼일회계법인에서 시니어를 거쳐 슈퍼바이저로 승진했을 때의 일이다. 그 연배면 당연히 돌아오는 해외연수의 기회가 그에게만 오지 않았다. 미국의 회계법인과 자매관계를 맺은 국내 대형회계법인에서 일정한 자격의 회계사에게 부여하는 해외연수는 외국의 세법, 국제경제등을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다. 그와 파트너로 일하던 동료가 몇달동안 연수 떠날 준비를 하면서 미안함 때문인지 자신에게는 귀띔도 해주지 않았다. 그 해 대원세무법인으로 옮긴 것도 회사에 대한 섭섭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96년에 여성공인회계사회를 만든 것도 이런 차별을 줄여보자는 의도였다. 지난해 2월에는 회계사무소를 차려 독립했다. 현재 10년 이상씩 그와 거래하는 고객은 70∼80개의 중견기업과 개인사업체. 그 나이 또래의 중견회계사 기준으로도 적잖은 숫자이다. 그러다 보니 초등학교 5년인 아들(11)이 「아빠는 마음씨 좋은 사람, 엄마는 일을 잘 하는 사람」이라고 할 만큼 일에 파묻혀 사는 편이다. 기업들의 회계감사가 몰려 있는 1, 2월이면 거의 밤 12시, 평소에도 밤 9시가 넘어야 집에 들어간다.
그렇다고 주부로서의 역할을 등한시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 하나은행 신사동지점장인 남편 박웅규(43)씨와 아들, 시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아침식사는 직접 준비한다. 싸게 살 수 있는 집, 음식 맛내는 법등 살림정보도 전업주부 못지 않다.
그래서인지 그의 후배들은 직업인, 일하는 주부로서의 고민이 있을 때마다 그에게 상담하러 온다. 후배 서지희(34·삼동회계법인)씨는 『대학시절 선배의 취업특강을 듣고 회계사시험에 응시했다』며 『현업에서 일하면서 선배의 살아가는 모습, 조언등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자신의 분야에서 좋은 역할모델이 되겠다는 목표로만 치더라도 그는 성공한 여성이다.<김동선 기자>김동선>
●약력
58년 서울출생
80년 이화여대 경영학과 졸
공인회계사시험 합격
삼일회계법인 입사
86년 대원세무법인 입사
97년 노석미회계사무소 개업
94∼96년 여성개발원 자문위원
94∼현재 서울지법 민사조정위원
96∼현재 여성공인회계사회 회장
◎회계사란 어떤 직업인가/회계감사·세무자문서 경영컨설팅까지
공인회계사들은 흔히 「자본주의의 파수꾼」이라고 불린다. 회계사의 분석에 따른 기업의 재무상태 경영성과등이 투자자들의 판단근거가 되는등 경제가 돌아가는데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기업의 투자방향을 제시하는 컨설팅 일까지 회계사가 맡고 있다. 과거 회계감사, 세무자문등이 주요 업무였다면 요즘은 후자의 역할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그런 만큼 회계업무에 관한 기술적인 숙련도 외에 기업환경 새로운 경영기법등에 대한 지식과 판단력이 중요한 자질로 꼽힌다. 또 고객기업의 재정적 어려움이나 세무관계등을 대신 해결해주는 역할이므로 고객의 신뢰를 끌어내는 것도 필요한 자질로 꼽힌다. 기업주의 의도를 파악하고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은 더욱 중요하다. 서구에서는 변호사보다 선호도가 높을 정도로 인기직종. 국내에서도 고소득 전문직으로 평가받는다.
최근에는 경제한파와 관련해 눈총을 받기도 했다. 기업의 차입경영이나 분식결산등을 눈감아 줌으로써 부실경영을 방조했다는 것. 삼경회계법인의 손기원(37)씨는 『기업이 의도적으로 서류를 조작하거나 회계사가 병을 진단하고 치료법을 제시해도 기업이 받아들이지 않는등 회계사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다』고 설명한다.
자격시험은 회계 세법 회사법등을 내용으로 1,2차 필기시험을 치른다.합격하면 회계법인에서 2년을 시보로 일하며 그후 3차 시험을 거쳐 정식 회계사가 된다. 회계법인에서는 6∼7년 지나면 매니저로 승진하며 회사에 따라 디렉터직을 거친 뒤 회사의 출자 지분을 갖는 파트너로 올라가게 된다. 파트너로 승진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15∼20년.
국내 회계전문학원에서 1∼2년 공부한 뒤 미국에 가서 시험을 보는 형식으로 미국회계사자격증을 갖고 활동하는 사람도 400여명 된다.<김동선 기자>김동선>
◎여성회계사 얼마나 되나/현역 3,259명중 113명… 최근 급증세
여성공인회계사회에 따르면 지난 해까지 공인회계사시험에 합격한 여성은 222명. 2년간 회계법인에서 연수를 받아야 하는 규정에 따라 시보로 일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현재 113명이 활동하고 있다. 한국공인회계사회에 등록된 현역회계사 3,259명의 3.46%이다.
몇 년 전만 해도 한해 10명이 배출되기 어려웠지만 최근 합격자수가 급증하고 있다. 96년에는 전체합격자 250명 가운데 36명, 97년에는 450명 가운데 68명이 합격, 그 비율이 15% 정도이다. 미국은 여성회계사가 절반 이상이나 되는데 우리나라도 점점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여성공인회계사회 김금순(37·김금순회계사무소) 총무는 『여학생의 대학 경영학과 진학률도 높아지는 추세여서 여성회계사는 앞으로 더 많이 배출될 것』이라고 말했다.
예전에는 대형 회계법인들의 여성기피로 연수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나 최근엔 한국공인회계사회의 강제배당을 통해 모든 합격자에게 연수기회가 주어지고 있다.
회계사의 취업형태는 대형 회계법인에서 일하거나 독립해 개업한 경우등으로 나뉜다. 회계법인에는 여성회계사 74명이 있으며 젊은 층이 대부분이다. 이중에는 삼화회계법인에서 파트너로 일하는 이기화(39), 삼동회계법인의 매니저 서지희(34)씨등 간부로 승진한 경우도 있다.
개인사무소로 독립한 경우는 22명, 이밖에 증권회사(4명) 증권감독원(4명) 대학(4명)에 취업해 있으며 결혼 학업등의 이유로 일을 하지 않는 경우가 10명이다. 여성회계사 가운데는 미국회계사자격증까지 딴 사람도 3명이 있다. 이기화, 증권감독원 제도연구실에서 근무하는 전영순(38) 코오롱메츠 생명보험 감사로 일하는 이정선(35)씨등이다.<김동선 기자>김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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