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분없이 절대권한/결과에 책임안지면 자율은 무질서일뿐『고객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죄인은 접니다. 그러니 제발 아무 잘못없는 저희 직원들만은…』 100년 전통의 일본 야마이치(山一) 증권사가 경영난으로 자진폐업을 신청했던 지난해 11월24일 기자회견장에서 노자와 쇼헤이 사장은 참던 눈물을 터뜨렸다. 2,700억엔대의 손실은폐로 고객과 주주에게 용서할 수 없는 피해를 입힌데 대해 머리를 조아리며 모든 것을 「내탓」으로 돌렸다.
열흘 뒤인 12월5일 국내굴지의 한 증권사가 쓰러졌다. 사상 초유의 금융기관 도산사태에 놀란 고객들이 예탁금을 찾으려고 몰려갔을 때 증권사 직원들은 고용대책을 요구하며 태업(怠業)에 들어가 있었다.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게 된 직원들의 처지야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지만 제살길부터 찾겠다며 고객을 외면하는 행태는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올 2월말 은행주총. 정부는 은행인사 불개입을 천명했다. 22조원의 천문학적 부실채권으로 사상 최악의 적자결산을 했던 은행들은 부실문책과 감량경영을 위해 70여명의 임원들을 퇴진시켰고 직원도 수백명씩 감원했다. 그러나 부실책임으로 옷을 벗은 행장은 단 한명(충청은행장) 뿐이었고 대부분 행장들은 유유히 연임가도에 들어갔다.
절박해져야 실체는 드러나는 것일까. 똑같은 벼랑끝 상황에서 일본 금융기관은 「내탓이오」 「고객먼저」를 실천한 반면 한국의 금융기관들은 「네탓이오」 「나부터 살자」고 행동했다.
금융자율화는 오늘 한국경제의 화두다. 관치금융의 철폐없이 파괴된 금융시스템은 복구될 수 없다. 그러나 언제라도 고객이 먼저라는 기본철칙조차 망각하고, 부실책임을 스스로 지겠다는 최소한의 경영윤리마저 상실한 우리 금융풍토에서 과연 관치가 제거된다고 자율이 작동할 수 있을런지.
자율이 동전의 앞면이라면 뒷면은 책임이다. 책임은 의당 주주와 고객에게 지는 것이지만 우리나라 「금융사전」에서 주주, 고객이란 단어는 없다.
책임경영의 실종은 국내 은행이 행장 개인왕국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은행장들은 지분 하나 없이도 절대권한을 휘두르는 세계유일의 경영자다. 이같은 절대권력하에서 책임없는 자율금융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인사자율이 부실경영자에 대한 면죄부로 둔갑한 올 은행주총에서 이미 입증됐다.
외국은행간부 K씨는 『선진국에선 한번만 배당을 못해도 주주가 용납하지 않는다. 배당은 커녕 은행이 존폐위기에 몰려도 경영진이 살아남는 국내은행을 외국인 시각에선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자율금융의 「실패한 시험대」였던 올 은행주총이 열리기 약 2주전(2월12일께) 감독당국은 작년 은행 결산결과를 공표하려 했다. 그러나 「경영결과가 발표되면 주총에 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공표시기를 갑자기 월말로 미뤘다. 주주들은 부실은행장을 문책할 수 있는 기회를 잃었고 결국 정부는 은행부실을 「비호」한 셈이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부실경영자는 임기에 관계없이 문책되고 유능한 행장은 3연임, 4연임도 할수 있는 것이 진정한 책임경영이자 금융자율화』라고 말했다.<이성철 기자>이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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